Home 전통마을 석봉지역

동족부락이란  
 
오정동 대화동 읍내동 연축동 신대동 와동
송촌동 법동 중리동 비래동 석봉지역 목상동
문평동 신일동 덕암동 상서동 평촌동 장동
용호동 이현동 갈전동 부수동 황호동 삼정동
미호동

 

 


석봉·신탄진동(石峰·新灘津洞)

석봉동(신탄진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현재의 석봉동과 신탄진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용호동, 남쪽은 덕암동과 평촌동, 서쪽은 목상동, 북쪽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과 인접해 있으며, 경부선 철로를 경계로 서쪽은 석봉동, 동쪽은 신탄진동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북쪽으로 용정이 마을과 안골, 남쪽으로는 잔골, 한절구지, 남경마을 등 모두를 석봉동이라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본 대덕구 전통마을 자료조사는 현재의 석봉동과 예전에 석봉동이었던 신탄진동 지역을 하나의 석봉동지역으로 묶어 다루고자 한다. 그 이유는 조선 전기부터 이어온 석봉동의 역사를 말할 때 옛 석봉동(신탄진동)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의 석봉동지역은 동쪽으로는 구릉성 야산이고 서쪽은 야산아래 쭉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192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자연촌락이 철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신탄진역을 중심으로 인구가 점차 밀집하고 상업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석봉동 일대가 인구밀집의 상업 지역화 되면서 문평동에 서던 3·8일 장이 신탄진역 서쪽 석봉동 지역으로 옮겨와 이 지역의 인구가 더욱 밀집하고 상업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역전부락에서 동쪽으로 안골에 이르는 지역은 구획정리를 통해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집중 개발되었는데, 상업지역에는 여관과 유흥주점 등이 밀집되어있다.

    현재 석봉·신탄진 지역은 금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한 공업화로 남한제지공장·풍한방직·대한이연·쌍용양회 등의 제조업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밀집하여 예전의 농촌모습은 사라지고 도시화·공업화되었다. 이 지역의 교육시설로는 새일고등학교·대덕여고·신탄진중학교·신탄진초등학교·용정초등학교·석봉초등학교·신탄진고등학교가 있고 공공기관으로는 신탄진전화국·신탄진우체국·대덕구보건소·대전보훈병원이 있다. 그리고 집단 주거시설로 원창빌라·서우아파트·유락아파트·성문아파트·새여울아파트·한신아파트·흥진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석봉동의 연혁
    석봉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 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석봉동이 회덕현 근북면 석봉리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조선중기에 이미 석봉리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이래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여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석봉동도 회덕군 북면 석봉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석봉동은 신촌·내동·자암리·달송리·석봉리·덕운리·구직면 가작리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석봉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석봉동은 대덕군 북면 석봉리가 되었고, 1973년에는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석봉리는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장으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석봉동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소속된 행정동이자 법정동이 되었다.


석봉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남경 : 원래의 잔골의 나즈막한 산이었던 곳이었다. 1960년도 남경석이라는 사람이 집을 짖고, 남경마을이라고 하였다. 신탄진연초제창이 들어서면서 신탄진연초제조창 직원들의 사택이 대규모로 건설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그래서 집의 규모도 대지 25∼27평에 건평 9평으로 좁게 지어졌다.

    ○ 등마루마을 : 금강철교 부근으로 신생아파트에서 동북쪽, 원창빌라에서 동쪽에 위치하였던 마을로 이곳의 지형이 말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들이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이곳은 현도의 세거 성씨이던 보성오씨가 이주하여 세거하였다.

    ○ 뗏주막거리 : 남한제지 동쪽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에 이 지역에 떼로 만든 주막이 있어 이를 뗏주막거리, 뗏집막거리라 부른다. 도시개발 이전에는 한양조씨 2호 동래정씨 1호로 3가구가 거주하였으나 그후 타지로 이주하였다.

    ○ 망골(막은골) : 대덕구보건소 부근이며, 작은 산들이 둘러져있어 마을이 막힌 것 같아 막은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망골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는 반남박씨 10여 호가 거주하였고, 소나무가 울창했으나 현재는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서 있다.

    ○ 안골(내동) : 용정초등학교와 남한제지 사이로, 용정이마을 안쪽에 마을이 있다해서 안골 또는 내동이라고 부르며, 또 이 마을이 노변에서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어서, 안골이라고 부른다. 안골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후손들의 집성촌이었으나 경주이씨가 언제부터 안골에 세거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안골에 거주하는 이종도씨의 11대조의 묘가 삼정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도시개발 이전까지는 경주이씨 20호 정도가 거주하였고 한양조씨가 몇 가구 거주하였는데, 한양조씨가 안골에 입향하게 된 것은 70∼80년 전에 경주이씨을 처를 둔 사람이 처향을 따라 이주한 것이다. 현재의 라이프 아파트, 대우아파트, 한신아파트 및 단독주택지 등이 들어서 있는 곳이 옛날의 안골이다.

    ○ 역앞말(역앞마을, 역전부락) : 신탄진역에서 동쪽으로 도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신탄진역 앞에 마을이 있다해서 역앞말 또는 역전부락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경부선이 부설되고 신탄진역이 설치되기 전에는 마을이 없었다. 그후 경부선 개통과 신탄진역이 만들어지면서 인접마을 사람들과 충북 현도면 지역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오면서 상업을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역앞 말에서는 특별히 세거한 성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 용정이(용정, 용정리) : 안골에서 동쪽, 신흥사 절에서 북서쪽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 속에 용이 알을 낳았다 하여 용샘, 용정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용정이, 용정리라고 부른다. 일설에 용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을 용정리라 한다. 용정리에는 대략 20여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그 중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에 세거하였던 진주유씨들이 입향하여 6∼7가구가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었는데, 진주유씨들의 입향시기는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쯤이라고 한다. 그외 기타 여러 성씨들이 세거하였다. 지금의 신탄진동 1통 지역이다.

    ○ 한절구지(덕운) : 한절구지는 대한이연 공장에서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에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해서 한절구지라고 부른다. 또한 이 마을의 형태가 곶을 이루고있기 때문에 한절곶, 한절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마을에 찬물이 나는 샘과 절이 있다하여 한사동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한절구지에는 총 3∼4호 정도가 있었는데 주로 진주강씨들이 살았다. 이곳에는 진주강씨 재실이 있다.

    ○ 잔골(자운골, 자운) : 신탄진 동서간 문화의 거리에서 남쪽이 된다. 조선 인조 때 학자 복천 강학년이 이 곳에서 태어날 때, 붉은 구름이 집을 감쌌다고 하여 이 마을을 자운이라고 부른다. 또 이 마을은 낮고 작은 골짜기에 있다하여 잔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잔골에는 진주강씨들이 6∼7호가 살았다.


석봉동의 세거성씨
    ○ 경주이씨(慶州李氏) : 석봉동에 세거하였던 경주이씨는 용호동의 경주이씨와 같은 시조(始祖) 이알평(표암공)으로부터 17세 이천(국당공파 파조)의 셋째 아들 이달충(제정공파 파조)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석봉동의 경주이씨들도 용호동의 경주이씨들과 같이 제정공파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시조로부터 24세 되는 연산군과 명종대에 병절교위을 지냈던 이성호의 후손들이다. 이성호에게는 이인과 이굉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인의 후손들은 미호동에 세거하였고, 이굉의 후손들은 용호동과 석봉동에 세거하였다. 석봉동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진 이굉이 1536(중종 31)에 출생하여 1597(선조 30)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묘가 회덕의 삼정동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었던 이종길이 석봉동의 세거 성씨이었던 진주강씨 복천 강학년과 서로 상선(相善)하였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16세기에 입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진주강씨(晉州姜氏) : 회덕에 세거하였던 진주강씨는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시에 강감찬의 부장으로 흥화진에서 거란의 소손녕을 물리친 공으로 지중추사병부상서을 지낸 강민첨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분의 묘는 예산 감천동에 있다. 강민첨의 8대손이 되는 평창군수 강일우의 처 함양박씨의 묘가 온양 남면 서봉에 있는데 후손들이 온양에 세거한 동기가 되었다. 강일우의 손자 강문한이 온양에서 회덕으로 이사하여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강문한이 회덕에 입향하게 동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회덕에 정착하고 있던 생원 김숙준의 딸인 광산김씨와 혼인하면서 처향으로 이거한 경우라고 한다. 입향시기는 강문한의 생년이 1464(세종 10)이고 몰년이 1547(명종 2)이었던 것으로 보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문한은 5형제를 두었는데 강림의 후손들은 신탄진 석봉동 일대에, 강침의 후손들은 삼정리 일대에 많이 살고 있다. 또 강침의 손자 강제노의 후손은 동면 직동리에, 강학노의 후손들은 신탄진의 미호동에서 세거하였다.

    ○ 반남박씨(潘南朴氏) : 반남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반남박씨의 시조 박응주 또한 박혁거세의 혈손으로 그 상계(上系)는 실전(失傳)되어 밝힐 수 없다. 고려시대 반남(전라남도 나주의 속현)에서 세거하던 호족의 호장(戶長)을 지냈고, 그의 6세 손 박은이 조선초기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태종)을 도와 익대동덕좌명공신으로 좌의정에 이르렀고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박응주를 선조(1세)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하고 있다. 석봉동에 세거한 반남박씨는 시조로부터 9세 박진의 손자인 박세영이 진주강씨 강문한의 1녀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진주강씨가 낙향할 때 함께하여 석봉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반남박씨가 석봉리에 입향한 시기는 박세영 부친의 출생년이 성종 을미(1454)이고 졸년이 중종 임신년(1532) 인 것으로 보아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에 회덕의 석봉동에 입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봉동에 입향한 반남박씨는, 반남박씨 호군병중제이자사직진파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분촌되어 덕암동 지역 및 신탄진 일대로 거주지역이 확대되었다. 현재 신탄진 일대에 거주하는 반남박씨는 대부분 이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석봉동에 세거하였던 13세의 후손들의 일부가 분촌, 옥천으로 이주하여 옥천지역의 반남박씨들도 석봉동의 반남박씨들과 일족이다.

    ○ 보성오씨(普城吳氏) : 보성오씨는 족보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때 초나라 장수 오기의 후손인 무혜공 오첨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고려 초에 윤관과 함께 여진 정벌에 나섰던 오연총이 보성오씨이었다. 오연총의 현손 오수권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오현필은 그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보성오씨는 보성군 오현필을 실질적으로 시조로 삼고 있다. 보성오씨가 석봉동의 등마루에 입향하여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즉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에 세거하였던 보성오씨들이 분가하여 석봉동 등마루에 세거하게 되었다 한다. 등마루에 세거한 보성오씨는 현도면의 보성오씨 가운데 괴정파이다. 그런데 오희달씨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부터 충북북도 청원군 현도에서 곧 바로 석봉동 등마루에 온 것이 아니라 유성 쪽에서 거주하다가 석봉동으로 입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 유성을 거처 석봉동에 입향하게 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석봉동의 옛 지명
    ● 강비랭이(강벼랑이) [들] : 용정초등학교와 금강사이에 있는 들판으로, 금강변의 들에 벼랑이 있어 이를 강벼랑이 또는 강비랭이라고 부른다.
    ● 금강철교 [철교] : 새여울나루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사이에 있다.
    ● 남경 [마을] : 잔골과 신양마을 사이로 원래의 잔골의 나지막한 산이었던 곳이었다. 1960년도 남경석이라는 사람이 집을 짖고, 남경마을이라고 하였다. 그 후 신탄진연초제창이 건립되고 제조창 직원들의 사택이 대규모로 건설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 달송(達松) [마을] : 남한제지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 마을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가 많아 이를 달송이라 불렀고, 현재는 택지개발로 인해 소나무는 없고 주택만 들어서 있다.
    ● 동가재골(동가재동) [마을] : 덕암동 가재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가재골, 동가작골, 동가작동이라 부르는데 망골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 뗏주막거리 [마을] : 남한제지 동쪽에 있던 마을로, 옛날에 이 곳에 떼로 만든 주막이 있었기에 뗏주막거리 또는 뗏집막거리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이곳에 동래정씨 1호, 한양조씨 2호 등 모두 3가구가 있었다.
    ● 등마루 [마을] : 금강철교 쪽으로, 신생아파트에서 동북쪽, 원창빌라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이 말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들이었으나 현재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 등마루들 [들] : 옛날에는 들판으로 등마루들이라 불렀다. 현재는 풍한방직 신탄진공장과 등마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망골(막은골) [마을] : 대덕구 보건소 부근을 말한다. 작은 산들이 둘러싸여 마을이 막힌 것 같아 막은골이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하여 망골이라고 한다.
    ● 망골천 [내] : 망골에 있는 내를 말하는데, 망골에 있어 망골천이라 부른다. 이 개울은 목상교 쪽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된다.
    ● 몽선대(학선대) [바위] : 용정이 나루터와 취수장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 이 근처에 사는 류씨라는 사람이 금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이곳 바위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선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선경(仙境)을 구경하고 왔다하여 이를 몽선대라고 부른다. 또 학을 타고 올라갔다고 하여 학선대라고도 부른다.
    ● 복샘(복천 復泉) [샘] : 잔골에 있는 우물인데,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인조 때 학자 복천 강학년의 어머니가 강학년을 임신하였을 때 샘물이 말랐다가, 그가 출생 후에 다시 물이 솟아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강학년의 호 또한 복천(復泉)으로 삼았다. 지금은 택지개발로 그 샘이 없어졌다.
    ● 석봉(石峰) [마을] : 지금의 신탄장 부근으로 산봉우리에 돌이 많아서 석봉이라 부르는데, 석봉아래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석봉마을이라 부른다.
    ● 신양 [마을] : 한절구지와 남경마을, 청자마을의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 신탄나루터 [나루] : 금강철교(신탄진 쪽) 부근으로, 등마루에서 북쪽 금강변에 나루터가 있었는데 금강을 사이에 두고 현도면 버래마을과 연결되는 나루였다.
    ● 안골(내동 內洞) [마을] : 용정초등학교와 남한제지 사이에 있는 마을로, 용정이 안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안골, 내동이라고 부르며, 또 마을이 노변에서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있어서 안골이라고 부른다.
    ● 안골들 [들] : 안골마을에서 동남쪽에 들이 있어 안골들이라 한다. 옛날에는 들이었으나 현재는 아파트와 일반주택들이 있다.
    ● 양지나루터 [나루] : 금강교에서 금강하류 쪽에 위치한 나루로, 충북 양지마을과 왕래하는 나루라 하여 양지나루이다. 금강다리가 만들어지자 없어졌다.
    ● 역앞말(역앞마을, 역전부락) [마을] : 신탄진역에서 맞은편, 도로건너에 위치한 마을로 신탄진역 앞에 마을이 있다하여 역앞말, 역앞마을, 역전부락이라 부른다.
    ● 용정나루터(용정이 나루터, 용정진) [나루] : 용정초등학교에서 동쪽, 용정이 마을의 금강변에 있다하여 용정나루터, 용정이 나루터라고 부른다. 또한 조선시대 사화(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건)가 일어날 때마다 포리들이 갓쓴 사람만 검문하고 붙잡아 갔다는 나루터로 '초립동리 나루터' 라고도 한다. 이 나루는 용정이 마을에서 충북 현도면 노산리로 연결된다.
    ● 용정샴(용정샘, 용샘, 용정) [샘] : 옛날 용정이 마을 내에 있는 큰 우물에서 용이 알을 낳았다고 하며, 또한 용이 승천했다고 하여 이를 용정, 용샘이라고 부른다. 당시에는 이 샘의 물이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없어졌다.
    ● 용정이(용정마을, 용정리) [마을] : 안골에서 동쪽, 신흥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용과 관련된 설화가 있어 우물 이름이 용정, 용샘이다. 따라서 용샘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정이, 용정리라 부른다.
    ● 잔골(자운골, 자운) [마을] : 현재의 동서간 문화의 거리에서 남쪽이 된다. 인조 때 학자 강학년이 이곳에서 태어날 때, 붉은 구름이 집을 감쌌다고 하여 이 마을을 자운, 자운골이라 부르는데, 강학년의 호가 복천과 자운(紫雲)이다. 또한 마을이 낮고 작은 골짜기에 있어, 작은골이었는데 이것이 자운골, 잔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 장터(신촌) [마을] : 신탄진장 부근의 마을로, 신탄진역에서 서쪽에 새로 조성된 큰 마을을 장터 또는 신촌이라 부른다. 1929년 신탄진역이 신설됨에 따라 신흥장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 초당모퉁이 [마을] : 동가작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운평 송능상이 이곳에 초당을 짓고 후학들을 강학하였다고 하며, 이 초당의 모퉁이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하여 초당모퉁이라 불렀다.
    ● 한산사(寒山寺) [사찰] : 한절구지 뒤에 있는 절을 한산사라 하였는데, 해방 후 옛 절터에 다시 건립하였다.
    ● 한절구지(덕운 德雲) [마을] : 대한이연 공장에서 남쪽에 있다. 옛날에 큰절이 있었다 하여, 한절구지라고 부르며, 또한 이 마을의 형태가 곶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절곶, 한절구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현도교 : 석봉동과 충북 현도면을 이어주는 다리라 하여 현도교이다.
    ● 홍고개 [고개] : 신탄진고등학교에서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 홍고개골 [골] : 홍고개와 안골들 사이에 있는 골짜기라서 이를 홍고개골이라고 부른다.
    ● 망덕봉(望德峯) [산] : 신탄진고등학교 남쪽의 정수장 위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