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동 유적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37
상서동 유적
1. 청동기시대 주거지 | |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된 지역은 상서동으로 대전∼신탄진 도로와 1번 국도 사이에 남북으로 형성된 구릉의 동쪽 능선으로 대전∼신탄진 도로에 의해 동편의 능선 말단부가 잘리워진 상태이다. 이곳을 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총 8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1호 주거지는 해발고도 60m 가량의 구릉의 남서쪽 사면의 평탄한 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북동쪽 사면으로 2·3·4호 주거지가 입지하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 이어지는 이 능선의 정상부에 5·6·8호 주거지와 남쪽사면 중간부에 7호 주거지가 위치하고 있다. (1) 1호 주거지(住居址) 1호 주거지는 남북 방향으로 형성된 주축 능선 동남쪽 사면의 정상부 가까이에 위치한 것으로 약10㎝ 가량의 표토(表土)를 제거하자 바로 수혈의 윤곽선이 노출된 곳이다. 주거지의 장축(長軸)은 북에서 서로 약30°정도 틀어져 있으며 대체로 구릉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축 504㎝, 잔존 단축 410㎝(추정 단축 498㎝)의 말각방형의 수혈주거지인데 수혈의 깊이는 북서 벽이 가장 잘 남아 있어 66㎝정도 되는데 반해서 남동 모서리 부분은 풍화작용 등의 자연침식으로 인해 주거지 바닥 면까지 삭평·유실되어진 상태로 확인되었다. 1호 주거지의 내부시설로는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그 내부 좌측에 2개, 우측에 1개의 기둥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타원형구덩이는 장축이 128㎝, 단축 58㎝, 깊이 18㎝로 단면은 'U'자형으로 파여져 있었고 기둥구멍은 직경이 23㎝, 주거지 바닥에서 깊이가 32㎝이다. 다른 타원형구덩이와 달리 내부의 기둥구멍이 3개인데 이는 좌측의 기둥구멍들 사이에 조그만 돌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보조기둥을 후에 세운 것으로 유추된다. 이밖에 기둥구멍은 7개 확인되었으며, 그 중 5개는 벽을 따라 140∼160㎝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돌아가고 있다. 내부에 퇴적된 층위는 6개 층으로 세분된다. 위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Ⅰ층 흑갈색 사립점토층, Ⅱ층 암갈색 사립점토층, Ⅲ층 암갈색사립 점토층, Ⅳ층 흑갈색 점토층, Ⅴ층 황갈색 점토층, Ⅵ층 명황갈색 점토층이다. 사립 성분이 많이 혼입된 Ⅰ∼Ⅲ층 및 주거지 바닥 전면에 점질 층을 이룬 Ⅴ층으로 보아 유수에 의한 퇴적으로 유추된다. 또한 현재 표토를 제거한 1호 주거지 아래 사면은 급경사로 도랑을 이루고 있어, 이전에 이곳으로 유수가 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호 주거지의 동벽은 유수에 의해 유실되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타원형구덩이 내부층 위를 보면 위에서 목탄과 소토가 혼입되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점질이 강한 회색 점토층을 이루고 있었다. 구덩이의 어깨에는 숫독 2점이 비스듬히 걸쳐 있었으며 동쪽 기둥구멍 위에 1개체 분의 송국리형 토기가 노출되었다. (2) 2호 주거지(住居址) 2호 주거지는 해발고도 63m 가량의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1호 주거지에서 북동방향으로 15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으로 3.8m에 3호 주거지 북동쪽으로 8.4m에 4호 주거지가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의 장축은 북에서 동으로 약 70°정도 틀어져 구릉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축이 390㎝, 단축 314㎝의 타원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수혈의 깊이는 북동 벽 부분이 가장 잘 남아있어 72㎝ 가량 된다. 경사면 아래쪽인 남서 벽은 거의 유실되어 3∼4㎝ 정도 깊이 밖에 남지 않았으나 원래 벽은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로는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그 내부 좌·우측 양단에 기둥구멍이 있다. 타원형 구덩이의 장축은 98㎝, 단축은 40㎝, 깊이 10㎝이며, 기둥구멍은 직경 32㎝, 바닥에서 깊이 57㎝이다. 그밖에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내부에 퇴적된 층은 7개 층으로 세분된다. Ⅰ층은 흑갈색 사립층, Ⅱ층은 황갈색 사립층, Ⅲ층은 회흑색 목탄층, Ⅳ층은 적갈색 사립점토층, Ⅴ층은 흑갈 색목탄층, Ⅵ층은 황색 사립점토층, Ⅶ층은 소토층으로 구분된다. Ⅲ층과 Ⅴ층에서 불에 타 쓰러진 기둥들의 단면이 확인되고 있으며, 주거지 바닥 전면에 지붕 또는 기둥의 목탄이 깔려 있었다. 즉, 2호 주거지는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부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거지 폐기 후 화재가 일어난 것으로 유추된다. (3) 3호 주거지(住居址) ![]() 3호 주거지는 2호 주거지에서 남동 방향으로 3.8m 떨어져 해발 62m 정도 되는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의 장축은 2호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북에서 동으로 70°정도 틀어져, 대체로 구릉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축이 548㎝, 단축 508㎝, 최대 깊이가 106㎝의 말각방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주거지의 북·동 벽의 일부 민묘에 의해 교란되어져 있으며 남·동 벽은 묘를 이장되면서 주거지 바닥까지 파괴되어졌다. 내부시설로는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그 내부 좌·우측 양단에 기둥 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타원형구덩이는 장축이 140㎝, 단축 56㎝(추정 단축 60㎝), 깊이가 24㎝로 단면은 'U'자형으로 파여져 있다. 기둥구멍은 직경 17㎝, 주거지 바닥에서 깊이 54㎝이다. 이밖에 기둥구멍 6개가 확인되었으나.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내부에 퇴적된 층은 크게 6층으로 세분된다. Ⅰ층은 황갈색 사립층, Ⅱ층은 사립층, Ⅵ층은 황갈색 점토층으로 구분된다. 회갈색 사립층, Ⅲ층은 회흑색 목탄층, Ⅳ층은 황갈색 사립층, Ⅴ층은 갈색 특히 Ⅲ층의 회흑색 목탄층은 주거지 내부의 타원형 구덩이 쪽으로 'U'자형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이 Ⅲ층에서 다량의 유물이 집중되어 출토되었다. 타원형구덩이 내부 층위를 보면, 위에서 목탄이 혼입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회색 사립층, 바닥 전면에 점질이 강한 흑갈색 점토층을 이루고 있다. 구덩이의 어깨에 숫돌 1점이 비스듬히 걸쳐 있었으며, 무문토기 저부편이 우측 기둥구멍 위에 놓여 있었다. 또한 구덩이 내부에 석재 편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4) 4호 주거지(住居址) 2호 주거지에서 동쪽으로 해발 63m 지점인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서·동·북쪽은 어느 정도의 평탄면을 이루고 있으나 남쪽은 약간의 경사면을 하고 있는 지형이다. 2호 주거지와는 8.3m, 3호 주거지와는 5.1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평면형태는 장축이 424㎝, 단축 398㎝, 최대 깊이가 64㎝로 말각방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주거지 남동 벽 일부가 후대 교란에 의해 벽선이 분명하지 않고 북벽이 밖으로 약간 밀려나 있는데 이는 주거지 폐기 후 벽의 유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시설로는 주거지 중앙에 남북 장축방향의 타원형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남북장축이 117㎝, 동서너비 64㎝, 깊이가 28㎝로 단면은 'U'자형이다. 구덩이 내부의 좌·우측양단에 2개의 기둥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이 중 좌측의 기둥구멍은 직경이 23㎝, 깊이가 40㎝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굴착되어 있으며 우측 기둥구멍은 직경이 22㎝, 깊이가 50㎝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외 기둥구멍은 벽선을 따라 3개가 확인되었으며 직경과 깊이가 타원형구덩이내의 기둥구멍에 비해 작다. 내부 층위를 보면 주거지 상부에 Ⅰ층인 갈색 사립층이 불규칙하게 덮여 있어 수혈윤곽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Ⅱ층에는 황갈색 사립층, Ⅲ층 황회색 사립층, Ⅳ층 회색 사립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5) 5호 주거지(住居址) 5호 주거지는 해발고도 60m 가량의 구릉 동쪽 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4호 주거지에서 남동 방향으로 35m 정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 바로 옆에 6호 주거지가 위치하고 있다. 5·6호 주거지 모두 송국리형 주거지이나 거리간격 및 수혈깊이의 차등으로 보아 동시기의 주거지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5호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직경이 424㎝, 깊이가 66㎝의 원형 수혈주거지이다. 주거지의 북서벽은 성격 미상의 수혈유구에 의해 부분적으로 교란되었으며 남서벽은 이장된 묘에 의해 파괴되었다. 내부시설로는 중앙에 남북장축 방향의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좌·우측 양단에 기둥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타원형구덩이는 장축이 110㎝, 단축 70㎝, 깊이가 21㎝로 단면은 'U'자형이다. 기둥구멍은 직경이 15㎝, 깊이가 46㎝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굴광하였으며 이외 다른 시설은 없다. 내부에 퇴적된 층위는 13개의 층으로 세분되나, 크게는 퇴적 순서에 따라 8개 층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①층은 밝은갈색 사립점토층 ②층은 황갈색 사립점토층 ③층은 적갈색 사립점토층 ④층은 갈색 점토층 ⑤층은 어두운갈색 점토층 ⑥층은 흑갈색 목탄포함층 ⑦층은 회색 사립점토층 ⑧층은 갈색사립점토층 ⑨층은 암갈색 점토층 ⑩층은 암갈색 점토층 ⑪층은 흑살색 목탄포함층 ⑫층은 적색 소토층 ⑬층은 밝은갈색 점토층이며 이들을 퇴적 순서에 따라 크게 ①층은 Ⅰ층, ②·⑧층은 Ⅱ층, ③층은 Ⅲ층, ④·⑤·⑥층은 Ⅳ층, ⑦층은 Ⅴ층, ⑨층은 Ⅵ층, ⑩·⑪층은 Ⅶ층, ⑫·⑬층은 Ⅷ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Ⅳ층은 제1의 목탄층으로 전체적으로 타원형구덩이 부분으로 'U'자형의 형태를 띠며 퇴적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목탄이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유물이 집중되어 출토되고 있다. 또한 Ⅶ층은 제2의 목탄포함층으로 주거지 바닥 전면에 목탄 및 소토부가 깔려 있었다. 타원형구덩이 옆으로 직경 11㎝의 원형 기둥 목탄이 쓰러져 있어 구덩이 내부의 중심 기둥으로 생각된다. 벽 부분의 목탄들은 이에 비해 작은 기둥들이 소토와 함께 나타났다. 특히 벽을 따라서 횡으로 목탄이 확인되고 있어 주거지 벽체의 기둥으로 유추되며, 이 소토들은 벽체기둥이 무너지면서 같이 무너져 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주거지 벽 부분 이외에 중앙 및 주변에 소토들이 확인되는데, 이 소토부들은 퇴적토 위에 형성되어 있어 주거지 내부에 이 소토부와 관련된 시설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중앙에 형성되어 있어 벽과 관련된 소토로 보기에도 어렵다. 이로 보아 지붕과 관련된 소토부들이 아닌가 추측된다. (6) 6호 주거지(住居址) 5호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구릉 동쪽 능선 정상부의 평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5호 주거지에서 동쪽으로 64㎝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6호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축이 394㎝, 단축 338㎝, 깊이가 12㎝의 방형 주거지이다. 주거지가 조영되었던 구 지표보다는 삭평되었다고 생각되지만 바로 옆의 5호 주거지와 수혈의 깊이가 44㎝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원래 수혈의 깊이가 얕았던 것으로 보여지며 주거지의 남서 벽은 이장된 묘에 의해 바닥까지 파괴되었다. 내부시설로는 중앙에 북동-남서 장축의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그 구덩이 양쪽 끝에 내·외부에 반반씩 걸쳐 기둥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상서동 유적의 다른 송국리형 주거지와 달리 수혈의 깊이와 형태가 다르며, 또한 타원형구덩이 내부의 기둥구멍 배치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 끝선에 배치되어 있다. 5호 주거지와 협소한 간격을 두고 위치한 점과 더불어 위에 언급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 상서동 유적의 다른 송국리형 주거지와는 시기 차가 있는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주거지의 삭평으로 인하여 유물의 양이 빈약하며, 유물 상으로도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고 있어 유물로 선후관계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밖에 기둥구멍이 7개 확인되었으나 이장된 묘로 인해 파괴된 남서 벽 부분까지 고려하면 원래 8개의 기둥구멍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 기둥구멍들은 가로-세로 3×3으로 배치되어 있다. (7) 7호 주거지(住居址) 해발고도 58m의 남쪽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주거지로 장축방향은 북에서 동으로 30°가량 틀어져 대체로 구릉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경사가 심하여 주거지의 남벽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로 풍화 암반토가 아닌 그 위 퇴적토를 굴광하여 주거지를 조영하였다. 7호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축이 308㎝, 단축 218㎝, 깊이가 54㎝의 장방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주거지의 벽선은 비스듬하게 굴광되어 있으며 남벽 양쪽은 수혈유구 3호로 인해 교란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내부 시설로는 중앙에 직경 66㎝, 깊이 10㎝의 원형의 토광형 노지가 설치되어 있다. 노지 내부에는 구연부가 결실된 토기 저부편 2점이 중첩되어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노지의 내부 층위를 보면 상부에 다량의 목탄이 혼입되어 있었으며 그 아래에 붉은 소토가 2∼3㎝ 두께로 깔려 있었다. 그밖에 직경 20㎝, 깊이 13㎝내외의 기둥구멍이 4개가 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내부 층위는 5층으로 구분된다. 위에서부터 Ⅰ층은 갈색 점토층, Ⅱ층은 흑갈색 목탄포함층, Ⅲ층은 황갈색 점토층, Ⅳ층은 짙은 갈색 점토층, Ⅴ층은 황갈색 점토층으로 구분된다. 특히 Ⅲ층과 Ⅳ층에서 유물이 집중되어 출토되었다. (8) 8호 주거지(住居址) 구릉의 동쪽 능선의 해발 59m인 정상부 평탄면에 위치하고 있는 주거지로 장축은 북에서 동으로 30°가량 틀어져 구릉의 능선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축 488㎝, 단축 440㎝로 방형의 수혈주거지이다. 최대 깊이는 12㎝로 거의 삭평되었다. 남벽과 동벽 일부는 삭평으로 인하여 벽선의 상당부분 유실되었으며, 벽선은 수직으로 굴광되어 있다. 주거지 동편으로 16·17호 민묘가 위치하고 있는데, 16호 민묘는 깊이가 26㎝, 17호 민묘는 128㎝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8호 주거지는 원래 수혈의 깊이가 매우 깊은 주거지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내부시설로는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주거지 중앙에 위석식 노지가 설치되어 있다. 노지의 남북장축은 58㎝, 동서너비 47㎝, 깊이 3㎝로 중앙부에 붉은 소토가 깔려 있었으며 노지 북쪽에 25㎝ 내외의 길다란 돌이 위치하고 있다. 기둥구멍은 벽선을 따라 9개, 주거지 중앙부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 퇴적된 층위는 위에서부터 Ⅰ층 적갈색 사립층, Ⅱ층은 암갈색 사립층, Ⅲ층은 적갈색 사립층, Ⅳ층은 연적색 사립층으로 구분된다. Ⅱ층인 암갈색 사립층은 다량의 목탄이 혼입되어 있는데, 주거지 바닥에서도 목탄이 중앙부를 향하여 노출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소토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로 보아 8호 주거지는 화재에 의해 폐기된 것으로 보여진다. 7·8호 주거지는 상서동의 주류인 송국리형 주거지가 아닌 노지를 가지고 있는 방형의 주거지이다. 특히 8호 주거지는 위석식 노지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중구연 거치문 토기편 1점이 확인되어 송국리형 토기계통 이외에 변형팽이형 토기 계통의 주거인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2. 민 묘(民墓) | |||||||||||||||||||||||||||||||||||||||||||||||||||||||||||||||||||||||||||||||||||||||||||||||||
상서동의 조사구역에서 민묘는 총18기가 조사되었으며 조사내용을 간략히 기술하면 아래 <표>와 같다. 구릉 동쪽 능선의 정상부 평탄면에 등고선과 평행하여 북서-남동 장축을 하고 있는 17호 민묘를 제외하고는 17기 모두 구릉 남사면에 등사선과 직교하여 구릉 방향과 일치되게 조성되어 있다. 12호는 너비 124㎝ 가량의 넓은 규모 등으로 보아 부부 합장묘로 유추된다. 부장유물은 7·10·13·14·1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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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 타 | |
구릉의 남사면 저지대의 평탄한 면에 고상 구조물이 조사되었으며 5·7호 주거지를 파괴한 수혈유구 3기가 조사되었다. 고상 구조물은 9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네 모서리의 4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하여 규모를 추정하면 320×280㎝이다. 특히 2개의 기둥 구멍 내에서 즐문토기가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고상 구조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시기비장은 C14연대 측정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수혈유구 1호는 5호 주거지와 중복관계를 갖는 유구로서 주거지 내부 및 북동 벽 바깥쪽의 생토면을 일부 굴광하고 축조되어 있다. 장축이 214㎝, 단축이 176㎝, 깊이가 32.5㎝의 타원형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에는 다른 시설물이 없으며 무문토기편 및 석재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는 토광 축조시 5호 주거지 퇴적토 내의 유물들이 혼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수혈유구 1호의 정확한 성격 및 조영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다. 수혈유구 3호는 7호 주거지의 남동 벽을 파괴하고 조영된 것으로 원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내부시설은 전혀 없으며 무문토기편이 몇점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경사면에 전체적으로 퇴적되어진 양상을 보이고 있어 유구와 관련된 유물로 보기에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