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동 유적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46
신대동 유적
1. 청동기시대 주거지 | |
신대동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총 9기가 조사되었다. 주로 구릉 정상부와 사면(斜面)에 조성되었는데 정상부와 경우 주거지 사이에 중복현상이 심한 편이며 사면의 주거지들은 대부분 반파(半坡)된 상태로 장축 방향(長軸方向)은 등고선(等高線)과 평행한다. (1) 1호 주거지(住居址) 1호 주거지는 구릉의 가장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장방형 거주지(長方形住居址)로서 북쪽의 절반 가량이 유실되었다. 주거지의 규모는 동서가 470㎝이고 남북 잔존 길이는 242㎝이며 깊이는 남벽 부분이 최고 80㎝이다. 주 기둥은 30×20×8㎝ 내외의 할석(割石)을 그 높이 만큼 바닥면을 파낸 후 동서 양벽 부근에 초석(礎石)을 설치한 매우 견고한 기둥 배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서쪽 초석 중심부에는 직경 10㎝의 기둥이 놓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두 초석과 함께 주거지의 남벽 어깨선에 인접한 바닥에 6개, 두 초석 사이에 4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직경 10㎝내외이며 깊이 3∼9㎝ 가량 된다. 노지(爐址)는 판상(板狀)의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바닥의 중앙부에 설치한 위석식 노지(圍石式爐址)로서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노지 형태는 3호와 7호 주거지에서도 확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유물은 형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문무토기 동·저부편(無文土器 胴·底部片)과 홍도(紅陶) 등 대부분이 주거지 최상면의 충전토에서 뜬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합인석부와 숫돌 각 1점이 서벽 아래의 바닥면에 놓여진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이 주거지의 벽면과 바닥면에서 20∼40㎝ 까지의 상면에 많은 양의 목탄과 소토가 다량으로 충전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2) 2호 주거지(住居址) 구릉 정상부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9호 주거지를 파괴하고 축조되었다. 절반 가량이 유실된 상태로 규모는 472×460×34㎝이다. 전체 형태는 말각방형인데 기둥구멍은 네 벽의 중앙부 가까이 대칭으로 각 1개씩 배치되어 있으며 북서쪽에 보조기둥이 2개 남아 있다. 한편 주거지 북서쪽에 46×36×5㎝ 크기의 타원형 수혈 안에 불에 탄 소토가 채워져 있었는데 노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출토유물로는 홍도와 구순각 목토기를 비롯해 석창, 반월형 석도, 대팻날 등이 있다. (3) 3호 주거지(住居址) ![]() 3호 주거지는 구릉의 남쪽 사면에 6호 주거지와 평행하게 축조되었다. 장축은 동서방향으로 등고선과 일치하며 884×348×60㎝ 규모의 장방형 주거지인데 동쪽과 서벽 일부가 후대의 민묘 이장으로 인해 파괴된 상태이다. 주거지 내 노지(爐址)는 서쪽과 중앙부에 위석식 노지가 각각 하나씩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파괴 유실된 동쪽 부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3호 주거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에 주로 보이는 삼각 조대문이 동체부에 시문된 편구형의 독특한 홍도와 함께 구순각목 토기, 변형 팽이형토기, 컵형 토기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단병식 마제석검 파부편을 비롯해 일단·이단경식 석촉, 대팻날, 어망추 등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
2. 청동기시대 고인돌 | |
![]() 석곽의 축조는 바닥에 10㎝ 내외의 잔돌을 깔고 그 위에 30×20×13㎝ 내외의 할석을 편평한 면을 이용해 장방형으로 배치하여 만든 구조이지만 일부 파괴된 상태라서 원래의 형태를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출토유물은 홍도 1점을 비롯해 혈구(血溝)가 있는 2단병식 마제석검(二段柄式磨製石劍) 1점, 3각만 입석촉(三角彎入石鏃) 10점, 2단경식 석촉(二段莖式石鏃) 3점등이 있다. |
3. 통일신라시대의 석곽기(石槨墓) | |
청동기시대 고인돌인 1호 석곽이 위치한 동일 사면의 구릉에서 통일신라시대 석곽(石槨) 3기가 조사되었다. 2·3호 석곽은 대부분 파괴된 상태이며 4호 석곽이 일부 파괴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래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4호 석곽은 현재 단벽(短壁)인 동서길이가 120㎝로서 굴광선이 명확히 확인되며, 장벽(長壁)인 서벽의 남북 길이는 남쪽 부분이 유실된 채 190㎝ 가량 남아 있다. 바닥에는 10㎝ 내외의 막돌들이 깔려 있는데 시상대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북벽 바로 아래의 바닥에는 45×20×6㎝의 편평 할석이 하나 있는데, 이 할석 위에 토기 두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이들 중 한점은 경질의 완이며 한점은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는 회색 연질뚜껑이다. |
4. 기 타 | |
조선시대 건물지 1기와 성격미상의 적석유구(積石遺構) 1기가 북쪽 구릉의 남사면 하단부에서 조사되었다. 그리고 남쪽 구릉에서 소형 석관묘 1기, 고토양층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긁개 1점과 돌날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