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국화주
카테고리
무형문화재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97
본문
* 분 류 : 음식과 무예
*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2호(대덕구 송촌동)
* 지정연도 : 2016.02.12
* 기능보유자 : 김정순
1. 개 요
전통적인 비법을 간직한 우리의 술은 삼한시대 이래로 빚어져 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백여 종에 달하는 술들이 빚어져서 다양하게 발달된 술이 조상들의 생활에 멋과 여유를 더해주었다. 술은 기호식품으로뿐만이 아니라 각종 제사, 의식, 손님 접대 등 사용처가 많아 생활필수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일 년 내내 각종 행사가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마다 그 지방의 자연환경에 알맞은 향토 술들이 다양하게 빚어져왔으며 그에 따라 각 고을마다 특징 있는 술들이 그 멋과 맛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토속적인 향토 술들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는 주세 정책으로 가정에서 빚는 향토주를 밀주로 단속하였기 때문에 은밀히 빚어졌다. 해방 후에는 급속한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술도 정부의 단조로운 통제정책에 의해 일반 가정에서 술을 빚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서구식 술들만 활개를 치면서 우리의 전통주는 점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후 80년대 들어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전통 민속주의 개발을 시작하였고 지역마다의 특색 있는 전통을 살리기 위해 민속주 제조를 장려하여 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전통 민속주의 종류는 크게 곡주·약용주·증류주로 나눌 수 있는데 약용주는 일반적인 곡주에 특수한 한약재를 배합하여 빚어내는 술로서 민간요법적으로 사용해온 독특한 술이라고 할 수 있고, 증류주는 전통적인 고리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곡주를 증류한 일종의 소주로서 도수가 매우 높은 술이다. 그리고 곡주란 주로 멥쌀이나 찹쌀을 주원료로 하여 누룩을 사용해서 발효시켜 빚어내는 술로서 우리 전통 민속주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며 동춘당 국화주도 곡주에 해당한다.
은진송씨가에 보관되어 있는 고서(古書) 주식시의(酒食是儀)에는 화향입주로 기록되어 있는 동춘당 국화주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은진송씨 집성촌인 송촌동 소재의 동춘당 문정공파 문중과 종가에서 누대에 걸쳐 빚어 온 비주(秘酒)이다.
동춘당 국화주는 10월 국화(황국)가 만개 될 시기에 밑술이 만들어지고 2차로 본술을 담금한 다음 약 보름간의 발효·숙성기간을 두어 만들어진 매우 정성이 깃들은 전통 민속주로 원료는 통밀, 멥쌀, 찹쌀, 국화(황국)이며, 누룩의 주원료는 밀이다. 색깔은 황갈색을 띠며 은은한 국화 향이 특징이다.
국화주는 조선시대 은진송씨 문중에서 사대부들을 위한 손님 접대용은 물론 명절과 기일에 제주로 애용하던 명주이며 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은진송씨 문중에 하사했던 궁중의 술로 현재 그 본래의 양조비법이 이어져 내려와 현재 동춘선생의 13세손 송춘기의 처 김정순씨가 국화주 제조 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고유의 맛을 재현하고 맥을 이어가고 있다. 국화주 양조기법의 기록은 가문에서 기록하여 전승되어온 요리책 『주식시의(酒食是儀)』에 잘 나타나 있다.
2. 동춘당 국화주의 전승과 유래
은진송씨는 고려 시대 말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장을 대표한 전통적인 사대부가로 오늘날까지 전통가문의 가풍과 음식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회덕 입향조 송명의는 은진송씨의 비조, 판원사부군 송대원의 증손으로 쌍청당 송유의 할아버지가 되며, 고려 공민왕 때 과거를 거쳐 사헌부집단에 올랐으나 시대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향이었던 회덕의 토정(토물)마을로 은둔하였다. 이곳 회덕으로 입향하게 된 사연은 송명의가 회덕황씨 황수의 사위가 된 데서 비롯되었다. 송명의의 아들 송극기가 타계하자 부인인 고흥류씨는 개경에서 4살 난 송유(1389∼1446)를 데리고 시부모가 살고 있는 회덕 백달촌(현재의 중리동)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쌍청당 송유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활동을 하다가 어머니가 살고 있는 회덕으로 낙향하여 은진송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송유는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인근 사족과 박연, 박팽년, 김수온 등 당시의 명사와 문장으로 교류하였으며, 이후 자손들이 번성되면서 백달촌은 자연적으로 송씨들의 마을인 송촌으로 불리게 되었고 영역이 확대되어 지금의 송촌동 지역은 상송촌, 중리동을 하송촌으로 분리 확대되었다.
은진송씨는 조선 후기까지 회덕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번성하여 동춘당파, 제월당파, 사우당파, 우암공파 등 37개 파로 확대되었다. 현재 국화주의 음식문화가 이어져 오는 가계는 동춘당 문정공파의 종손가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13세손으로 3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동춘선생이 기거하던 고택에서 살아오고 있다.
송촌에서 거주해온 은진송씨 종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송명의(사헌부 집단)→송극기(진사)→송 유(쌍청당, 부사정 1389∼1446)→송계사(상주판관 1407∼미상)→송요연(상주목사 1429∼1499)→송여집(선무랑)→송세영(승사랑 1495∼1532)→송응서(임천군수 1530∼1608)→송이창(영천군수 1561∼1627)→송준길(동춘당, 이조판서, 병조판서, 좌참찬 1606∼1672)→송광식(공조정랑 1625∼1664)→송병문(제천현감 1640∼1682)→송요경(동지돈영부사)→송태현(1694∼1710)→송부연(간성군수1738∼1769)→송계동(1769∼1787)→송경희(비서원승지 1776∼1795)→송석노(괴산군수 1789∼1840)→송종호(휘경원 참봉 1821∼1856)→송도순(장예원 경원임 1857∼1858)→송낙빈(1892∼1968)→송용시(1913∼1992)→송춘기(1932∼1992)→송성진(1958∼)
이처럼 은진송씨가 송촌에 세거한 이래 회덕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7세기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살던 시기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의 선비문화는 송준길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조선시대에 정치, 문화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조선 시대 시호를 받은 은진송씨 가문의 내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조선시대 우리고장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
이처럼 조선 시대의 사시(賜諡) 문화는 왕으로부터 사대부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고 한 인물에 대하여 생전의 행적을 평가하는 대명(大名)을 짓는 것을 시(諡)라 하였는데 그 기원은 중국 주나라 말엽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부터 사시가 행하여졌다.
효종과 함께 북벌을 추진한 예학의 거장인 송준길 선생은 임종하면서 유계(遺戒) 하기를 만사(輓詞: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를 청하지 말고 비를 세우지 말며 시(諡)를 청하지 말라 하였으나 우암 송시열은 귀양 중에 있으면서 지문(誌文)을 지어주었는데 비록 동춘선생의 명이 계시지만 묘에 지문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십허편(十許片)을 구어 만들어 광남 쪽에 매안하였다.
숙종 6년(1680) 5월에 관작(官爵)이 회복되자 그해 민정중이 송준길 묘에 사제(賜祭:임금이 내려주는 제사)하시기를 청하자 숙종 임금은 예랑을 보내어 묘에 사제하였는데 가깝고 먼 데서 모인 학자가 1,000여 명이었고 우암 또한 글을 가지고 와 제(祭)하였다.
숙종 7년(1681) 6월에 옥당관 이유가 송준길이 시(諡)를 청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특명으로 문정(文正)으로 사시(賜諡)하였다. 원래 시호는 자손들의 시장(諡狀)에 의한 상청(上請)이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돌아간 유현에 대하여 왕이 직접 사시한 선례인 퇴계, 신독재의 "不必待其諡狀賜諡"의 예대로 동춘당 송준길에 대하여 특명으로 사시하였다. 이후 숙종 12년(1686) 2월 후손들의 상고가 이어지자 비로소 사시례(賜諡禮)를 시행하였다. 이때 이랑 조상우가 내려왔고 각처에서 모인 자가 1,000여 명이 되었다.
숙종 12년(1686)에 시행한 동춘당 송준길의 연시안(延諡宴:연시 하라는 국가의 통고에 본가가 응하면 죽은 이의 신주를 받들고 나아가 선시(宣諡) 하러온 선시관을 맞아 의식을 행하고 그에게는 예폐를 그 수종자에게는 행하(行下)를 주고 잔치를 베푸는 일)은 자손과 문중의 광영으로 문중 성원들의 단결과 동질성을 강화시켜 주었기에 자긍심과 우월감으로 가문을 지키고 제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내린 사시(賜諡)는 단순히 사시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물(賻物) 및 사제(賜祭)를 위한 음식재료와 각종 궁중의 특별음식도 함께 하사되기에 궁중음식 문화가 사대부가에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은진송씨 동춘당 문정공파의 연시연을 계기로 종가에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궁중음식은 배추선, 보리수단, 숫장아찌, 오미자화채, 장선적, 두터적, 석이단자, 대추편포 등이며 술은 국화주와 송순주 등이 있다. 이러한 은진송씨 동춘당 문정공파 종가의 제례의례를 통한 문중의 자긍심과 가문의 내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18세기 후반에 쓰인 <주식시의(酒食是儀)> 1책 41장 필사본으로 조선시대 문중에서 각종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술을 제조하는 방법이 한글로 적혀 있는 요리 책을 통해서 궁중음식 요리법과 술 제조법을 후손에게 전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은진송씨 동춘당 문정공파 종가는 3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가 민속문화재 제289호로 지정된 동춘당 종택에서 살아오면서 가풍과 식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기호학파의 대학자이며 전국향교에 위폐를 봉안한 한국의 18현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후손들로부터 이어져 현재까지도 종가와 문중에서 국화주를 빚어 제례 상에 올리고 있다. 국화주는 가문의 요리책이라 할 수 있는 <주식시의>에 기록된 술로 우리고장 전형적인 사대부가에서 전해져오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가 스며있는 전통 민속주로 길이 보존하고 양조방법을 계승하여야 한다.
3. 국화주(菊花酒) 양조과정
1) 누룩 만들기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갖는 곰팡이를 일정한 곡류에 인공적으로 번식시킨 것으로 좋은 술맛을 내려면 첫째 누룩이 잘 되어야 한다. 누룩 띄우기는 언제든지 가능하나 띄운 누룩을 숙성시키기에 적당한 음력 8월이 가장 좋다.
① 누룩의 재료로는 통밀과 물인데 통밀은 맷돌에 갈아 고운 채로 쳐서 사용하고 물은 계족산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을 길어다가 펄펄 끓여 식힌 후 사용한다.
② 누룩을 만들 때는 밀가루 반죽이 중요하다.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할 때는 가급적 되게 반죽하는데 그 비율은 밀가루 1㎏에 물 1600㏄ 정도로, 반죽을 손으로 꼭 쥐어서 간신히 뭉쳐질 정도이면 적당하다.
반죽이 너무 질면 썩게 될 뿐만 아니라 누룩이 뜨질 않고 주저앉게 되며, 너무 되면 뭉쳐지지 않아 흐트러지게 된다.
③ 반죽이 끝나면 누룩판에 삼베를 깔고 반죽을 넣은 후 다시 삼베를 덮고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꾹꾹 밟아 다져 성형시킨다.
④ 만들어진 누룩은 25℃∼28℃ 되는 건조한 곳에서 약 30일간 띄우면서 4∼5일 간격으로 누룩을 뒤집어 준다. 더운 여름철에 누룩을 만들 때는 7일간은 썩지 않도록 매일 뒤집어 준다. 누룩이 다 숙성되었을 때의 한 덩어리 무게가 약 2.5㎏ 정도가 되며 누룩은 덩어리 형태로 보관하였다가 술을 빚을 때 사용한다.
2) 흰무리(술떡) 만들기
① 흰무리(술떡) 만들기는 멥쌀 3되를 하룻밤(8시간)을 물에 불렸다가 건져내 물기를 뺀 다음 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든 다음 90분간 시루에 찐다.
② 흰무리가 다 만들어지면 삿자리(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 위에서 차가워질 때까지 8시간 이상 식힌 후 잘게 손으로 부순다. 잘게 부서진 흰무리(술떡)를 밑술을 담기 위해 준비한다.
3) 밑술 담그기
① 덩어리 형태로 보관했던 누룩을 절구통에 넣고 곱게 부순 다음 도두미(채보다 엉근 것)로 쳐서 가루로 만든 후 그늘에서 2∼3일 말리고 밤이슬을 맞혀서 빛이 뽀얗게 되도록 바래서 쓴다.
② 말린 누룩가루와 잘게 부순 흰무리를 골고루 비벼 섞는데 멥쌀과 누룩의 비율은 멥쌀 3되(2.7㎏∼3㎏)에 누룩 1되(1㎏) 정도가 적당하다.
③ 밑술을 담을 항아리는 물로 깨끗이 씻어 말린 후 항아리 안에서 약쑥 300g정도를 태워서 연기로 소독하고 남아있는 재는 마른 헝겊으로 닦아낸다.
④ 준비된 흰무리와 누룩가루를 골고루 섞은 다음 끓여서 식힌 물을 넣고 되게 반죽을 한다.
⑤ 흰무리와 누룩가루와 물을 넣어 섞은 반죽을 항아리에 담그고 항아리 입구를 5∼6겹의 한지로 동여맨 다음 뚜껑을 덮은 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온헝겊(얇은 이불)으로 항아리를 감싸서 20∼25℃의 방에 놓아둔다. 3∼4일 정도가 되면 발효가 시작되는데 대략 10일 정도가 지나면 숙성되어 밑술을 얻을 수 있다.
4) 고두밥(술밥) 만들기
① 고두밥(술밥)은 재료가 찹쌀로 그 양은 밑술 재료의 멥쌀이 3되 정도일 때 본술 재료인 찹쌀은 1말(9㎏)을 준비한다.
② 밑술이 완숙되기 하루 전에 찹쌀을 하룻밤(8시간) 불렸다가 물기를 뺀 후 시루에 쪄서 고두밥(술밥)을 만든다.
③ 고두밥(술밥)이 만들어지면 삿자리(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 위에서 차가워질 때까지 완전히 식혀 본술 만들기를 준비한다.
5) 본술 담그기
① 국화주의 주재료인 국화(황국)를 600∼700g 준비하여 꽃이 손상되지 않도록 잘 씻은 후 그늘에 널어 물기를 뺀다. 3∼4월에 만드는 국화주는 말려놓은 것을 사용하나 국화(황국)가 만개하는 10월에는 생 국화를 사용한다.
② 숙성된 밑술과 고두밥(술밥)을 물과 버무려 반죽을 만드는데 이때 누룩을 다시 첨가하며 그 양은 밑술 담을 때의 누룩의 양 ½ 정도만 넣는다. 반죽의 정도는 질척한 상태로 만든다.
③ 약쑥의 연기로 소독하고 마른걸레로 깨끗이 닦아낸 항아리 속에 버무린 본술 반죽 양의 ½ 정도를 넣은 후 국화(황국)를 넣고(가문의 요리서 주식시의에는 국화를 삼베자루에 담아 묶은 채로 항아리 속에 넣는다고 기록) 다시 남아있는 나머지 반죽으로 국화를 덮는다.
④ 본술의 반죽을 넣은 항아리의 입구를 한지 5∼6장을 겹쳐 봉하고 뚜껑을 덮은 다음 보온이 유지될 수 있도록 보온 헝겊(얇은 이불)로 항아리를 감싸서 20∼25℃의 방에서 15일간 숙성시킨다.
⑤ 대략 보름(15일)이 지나면 숙성된 국화주를 얻을 수 있는데 숙성의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항아리를 봉한 한지를 조금만 열고 촛불을 그 입구에 갖다 대면 숙성이 덜된 것은 촛불이 꺼지고 완숙된 술은 촛불이 꺼지지 않음으로 숙성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6) 술 거르기(떠내기)
① 촛불을 대보아 꺼지지 않으면 완전한 국화주로 완성되었기에 뚜껑을 개봉하고 술을 떠낸다.
② 항아리 뚜껑을 열면 위쪽은 찌꺼기가 떠있고 아래쪽은 맑은 술이 가라앉아 있기에 떠내는 방법으로는 대나무로 짜서 만든 용수를 항아리 속에 밖아 넣고 굵은 통 대나무로 만든 국자를 사용하여 용수 속의 맑은 술만 떠내면 은은한 국화 향이 배어나는 황갈색의 국화주를 얻을 수 있다.
7) 동춘당 국화주의 성분분석과 특징
성분분석 :
에틸알코올 16%
PH 5.33총 산도(0.1N-NaOH ml/10ml) 4.70휘발 산도(0.1N-NaOH ml/10ml) 0.45아미노산도(0.1N-NaOH ml/10ml) 5.60환원당 3.17%색도-명도(L) 87.02 적색도(a) 1.75 황색도(b) 37.85
특 징
① 동춘당 국화주는 회덕 송촌의 은진송씨 문중에서 전승되어온 가양주(家釀酒)로 임금이 시호를 내릴 때 함께 하사된 궁중음식으로 현재까지 양조법이 종가에 이어지고 있다.
② 술의 색깔은 황갈색으로 국화의 독특한 향이 있어 마시기에 매우 좋으며, 마신 후에 숙취(宿醉)되지 않고 머리가 맑아는 특징이 있다.
8) 국화주 기능보유자
국화주의 제조기능보유자 김정순은 1935년 10월 3일생이다. 본관은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의 후손, 김선호(부)의 1남 6녀의 장녀로 충남 논산군 연산면 연산리에서 출생하여 동춘당 문정공파 13대 종손 송춘기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 집안 어른으로부터 종가의 제례 및 대소사에 필요한 음식, 곡주제조법을 전수받았으며 현재 대덕구 송촌동 동춘당 종택에 거주하고 있다.
* 동춘당 문정공파 종손 계보 및 전수연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