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신도비(神道碑)

카테고리
금석문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55
신도비(神道碑)

 
◎ 민여검 신도비(閔汝儉神道碑)
  • * 분   류 :금석문
  • * 구   분 : 향토유적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 * 연   대 : 1795년(정조19)
  • * 규   모 : 전체높이 216㎝, 높이 143㎝, 폭 66㎝, 두께 28㎝
  • * 서   자 : 송환기(宋煥箕)
  • * 찬   자 : 송시열(宋時烈)
  • * 윗글자 : 蔚山府使 贈禮曹判書 閔公 神道碑銘
  •                (울산부사 증예조판서 민공 신도비명)
  • * 앞글자 : 有明朝鮮國 嘉善大夫 行蔚山都護府使 兵馬同僉節制使 贈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世子左賓客 五衛都摠府 都摠管 閔公 神道碑 幷書(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행울산도호부사 병마동첨절제사 증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민공 신도비 병서)
  • * 주 해 :  민여검(1564∼1627)은 여흥인으로 호는 운촌(雲村)운곡(雲谷)이다. 선조22년 사마시에 급제한 후 회덕 선영(先塋)의 동쪽 경운리에서 은거하며 호를 운촌 또는 운곡이라 하였다. 여흥민씨 운촌공파의 시원(始源)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민여겸이 향년 64세인 1623년(癸亥) 윤10월 22일에 죽자 회덕의 삼정동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1681년(辛酉)에 민여검의 제손들이, 우암 송시열에게 비명(碑名)을 받고서도 곧 새겨 세우지 못해, 후손의 깊은 한이 되었으나 115년이 지난 1795년(乙卯) 9월에 우암 송시열의 후손 송환기의 기록으로 이 비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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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효함 신도비(朴孝誠神道碑)
  • * 분   류 :금석문
  • * 구   분 : 향토유적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 * 연   대 : 1800년(정조24)
  • * 규   모 : 전체높이225㎝, 비신높이166㎝, 폭64㎝, 두께34.5㎝
  • * 서   자 : 미 상
  • * 찬   자 : 서거정(徐居正)
  • * 윗글자 : 行江陵大都護府使 吏曹參判 朴公神道碑
  •                (행강릉대도호부사 이조참판 박공신도비)
  • * 앞글자 : 有明朝蘚國 嘉善大夫 行江陵大都護府使 贈吏曹參判 忠州朴公 孝誠 神道碑(유명조선국 가선대부 행강릉대도호부사 증이조참판 충주박공 효암 신도비)
  • * 주   해 : 박씨가 충주의 망족이라는 것은 신라에서 시작되었고 고려에서 현저하여 위인의 장한 덕이 세상에 두드러져 훌륭하게도 동방에 대성(大性)이 되었다. 부정공(副正公) 영(英)으로부터 5대를 전해 오다가 지성(之誠)에 이르러 벼슬이 숭록대부 민부상서가 되고 문장과 덕업으로 당세를 크게 울렸으니 박효암에게 고조가 된다. 부친은 성균진사로 사헌부 감찰과 진해 직산현의 감무으로서 통정대부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박효암은 청렴하고 정직하며 겸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명성이 군부에 떨치었고 통정대부에 올라 청주 목사를 하였을 때 치적이 많아서 공적이 제일로 꼽혔고, 청백리로 기록되어 얼마 안되어서 조정에 돌아와 첨추(僉樞)가 되고 또 얼마 안되어 외방에 나아가 강릉대호부사가 되었다. 박효암은 1387년(정묘)에 출생하여 1454년(갑술) 정월에 이르러 관청에서 죽으니 향년 68세이다. 임금께서 청백리로써 이조참판에 증직하시며 특별히 예장을 하사하시어 회덕현 북쪽 정당촌(正堂村) 뒤 꽃산(花山) 임좌(壬坐)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안동인으로 양촌(陽村)선생 영의정 문충공 근(近)의 손녀요 동지총제(同之摠制) 천(踐)의 딸이며 서거정에는 내재가 된다. 박효암이 죽은 후 7주 갑이 된 해 1800년(경신) 3월에 후손들이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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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위 신도비(李偉神道碑)
  • * 분   류 :금석문
  • * 구   분 : 향토유적
  •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 * 연   대 : 1988년
  • * 규   모 : 높이 190㎝, 폭 66㎝, 두께36.8㎝
  • * 서   자 : 서성관(徐成寬)
  • * 찬   자 : 송백헌(宋百憲)
  • * 앞글자 : 嘉善大夫 監司 李先生神道碑 銘幷序
  •                (가선대부 감사 이선생신도비 명병서)
  • * 주   해 : 이 위의 본관은 고성으로 조선 중기 때 문신이다. 이 위는 유년시절부터 총명과 재기가 남보다 앞서더니 장성함에 높은 도덕과 넉넉한 문장, 고매(高邁)한 인격으로 향리인당(鄕里隣黨)의 추앙함을 한 몸에 받았다. 1507년(중종2) 증광시(增廣試)에 등과 하여 최초로 벼슬길에 오른 후, 중종 3년에 장령을 제원 받았고 중종 5년에는 집의를 지내면서 문장으로 일세를 떨쳤으며 이어 황해감사로 나가서는 민생을 도모하고 풍속을 교화하여 세인의 칭송함이 높았다. 중종 9년에는 28인의 유사(儒師) 중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중종 11년에는 51인의 유사 중 수위로 뽑히는 영예를 차지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