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성(鷄足山城)
카테고리
산성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41
계족산성(鷄足山城)
* 분 류 : 관방유적
* 구 분 : 사적 제355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외
* 성둘레 : 1,037m
* 형 태 : 테뫼식 석축산성
* 연 대 : 백제시대
* 개 요 :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약 1.3㎞ 지점에 있는 봉우리(해발431m)위에 축조되어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대청호 건너편으로 충북 옥천군이, 북동쪽으로는 충북 보은군 지역이 바라다 보인다. 성의 둘레는 약 1,037m로 대전지역에 소재 한 30여 개소의 산성 중에 가장 규모가 큰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내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성의 축조 방식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 매
우 견고하게 축조되었다. 그중 하나는 자연석을 이용한 내탁기법(內托技法)에 의한 방식으로, 서벽, 동벽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축조 방식은 협축기법(夾築技法)인데 동벽 및 북벽, 서벽과 남벽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내에는 6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북벽을 제외한 남, 서, 동벽에 문지(門址)가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성내에는 2개소의 우물지가 발견되었고, 남문지에서 약 7m 가량 북쪽에 있는 봉우리에 봉수대(烽燧臺) 그리고 저수지가 있었다. 성내의 건물지, 봉수대, 저수지 등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와편, 토기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청자, 분청사기, 백자편 등이 출토되어 이 유적이 오랜 기간 동안 산성으로써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계족산성은 회덕이 우술군에 소속된 이래로 백제의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성은 백제가 망한 직후에도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당시 백제부흥군의 요충지인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시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사에 의하면 옹산성과 우술성은 같은 시기에 함락되고 있으며 수천명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옹산성 전투에 참여한 품일(品一)장군은 우술성 공격 시에도 지휘를 맡아 백제군 1천명을 사살하고 달솔(達率), 조복(助服) 등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있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옹산성은 계족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전투상황이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옹산성을 포위한 김유신 장군은 성을 함락하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부귀를 기약하라"고 전하였지만 백제 부흥군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신라군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여 임전의지를 다졌지만 수천 명이 사살 당하는 백제 민초들의 넋이 깃든 중요한 유적이다.
* 분 류 : 관방유적
* 구 분 : 사적 제355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외
* 성둘레 : 1,037m
* 형 태 : 테뫼식 석축산성
* 연 대 : 백제시대
* 개 요 :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약 1.3㎞ 지점에 있는 봉우리(해발431m)위에 축조되어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대청호 건너편으로 충북 옥천군이, 북동쪽으로는 충북 보은군 지역이 바라다 보인다. 성의 둘레는 약 1,037m로 대전지역에 소재 한 30여 개소의 산성 중에 가장 규모가 큰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내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성의 축조 방식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 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