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쌍청당(雙淸堂)

카테고리
전통건축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44
쌍청당(雙淸堂)

 

* 분   류 : 시 유형문화재 제2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71
* 수   량 : 1동
* 구   조 :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
* 재   료 : 목조(단청)
* 연   대 : 1432년(세종14)
* 개   요 : 쌍청당 건물은 1433년(세종15)에 학자 쌍청당 송유(宋愉)가 건립한 별당인데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은 후 1616년(광해군8)에 1차 중수, 1818 년(순조18)에 2차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쌍청당을 들어가는 좌측 입구 부분에는 요즘에 지은 안채가 있고 안채 앞 사랑채의 당호는 '원일당'이다. 쌍청당을 들어가려면 원일당 앞을 지나야 하며 옛날에는 이 마을을 윗중리, 백달촌 또는 하송촌이라 불렀는데 마을 동쪽은 상송촌으로 동춘당과 고택이 있다. 이 마을 앞의 약간 평평한 곳이 한촌이고 건너편 구릉 쪽으로 홈통골, 납작골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앞뜰 건너에 약한 언덕이 안산을 형성하고 계족산은 조산(朝山)이 되는 풍수 지리적 국면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계족산 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면서 갈비뼈 같이 몇 개의 자락이 뻗치는 형상인데 이런 형상을 '勿'(물)자 형국이라 한다. 북에서부터 읍내동, 송촌동, 가양동이 勿(물)자의 한 골씩 차지하고 있는 형상인데 이러한 '勿'자형국의 풍수로 유명한 곳은 회재 이언적선생이 태어난 월성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은 계족산에 비해 규모가 작고 한 골에 성씨 하나씩 차지하면서 세거해 오는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반면 이곳 계족산은 매우 큰 형상이어서 마을이 골마다 형성되지 않고 그 중 몇 개의 골에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014.jpgblank.gif쌍청당은 약한 구릉 언덕을 배경으로 정남향하고 있는데 흔히 '자좌오향(子座午向)'이라고 한다. 조그만 일각대문을 건물 앞에 두고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쌓고 담 위에는 기와를 올려 격을 높였다. 둘러진 담안에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쌍청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집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전체 칸수는 6칸이 되는데 이중 우측의 4칸은 마루로 하고 좌측의 2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뒤편에 반침을 내 달고 반침 밑에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이러한 평면 모양은 인근에 있는 동춘당이나, 송애당, 제월당과 같은 별당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이 쌍청당의 가치는 구들과 마루가 접합되어 건축되었으면서도 남방적인 지역성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고상식(高床式)으로 꾸민 점에 있다고 하겠다. 고상식이란 바닥을 지면에서 들어올려 바람이 마루 밑으로 소통하게 만든 것인데 습기가 많고 더운 지방에서 주로 지어 살던 집의 모습이다. 중국 남쪽 지방이나 동남아의 습기가 많고 더운 지방에 이런 집이 많다.

주택에서 별당은 사랑채 기능의 연장으로써 접객, 독서, 한유(閑遊), 관상 등의 목적이 크다. 별당은 또한 지역사회에서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별당은 선비의 생활을 담아야 하므로 선비다운 모습이어야 한다. 규모를 크게 하거나 요란한 장식을 해서도 어울리지 않는다. 쌍청당 기단은 사괴석을 한단 쌓아 만들었다. 이렇게 한 단으로 만든 기단을 '외벌대'라 한다. 2단이면 '두벌대', 3단이면 '세벌대'다. 기둥 밑에 받치는 초석은 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썼는데 이렇게 막생긴 초석을 '덤벙주초'라고 부른다. 마치 덤벙덤벙 놓은 것 같다고 그렇게 불렀다. 옛날 목수들은 '그랭이질'이라는 기법으로 막생긴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다. 그랭이질로 기둥을 세우면 아무리 울퉁불퉁한 초석이라도 기둥이 짝 달라붙는다. 기둥은 방형 모기둥(方柱)으로 하고 기둥머리에는 앞·뒷기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를 올려놓았다. 그런데 대들보를 기둥에 그냥 올려놓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대들보와 직각방향으로 '도리'라는 부재를 올려놓는데 이 때 기둥과 대들보, 도리가 만나는 곳을 홈을 파고 촉을 끼워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이런 짜 맞춤을 '사개맞춤'이라고 한다. 기둥에 끼워진 보 밑에는 보가 처지지 말라고 받침을 끼운다. 이 받침은 장식을 겸하고 있다. 기둥머리에서 새 날개처럼 밖으로 뻗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익공(翼工)이라 부른다. 이 건물에서는 익공이 하나지만 큰 건물에서는 2개나 3개를 다는 경우도 있다. 익공이 2개면 '2익공', 3개면 '3익공'이라 부른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마루는 지면에서 약간 들어 올려 더운 여름을 견디기에 안성맞춤이다. 마루를 걸으면 약간 울리는 듯한 반동이 있어야 제 맛이다. 우리네 옛 마루는 걸을 때 울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루 밑에 동발을 많이 받치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마루를 만들 때에는 못을 쓰지 않는데 장선 이라는 부재 사이에 홈을 파고 널빤지를 유리 끼우듯 하나씩 끼워 만든다. 그래서 못이 필요 없는 것이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한껏 베어 있다. 이렇게 만든 마루를 '우물마루'라고 한다. 마루 좌측편에 온돌방이 있고 방과 마루 사이에는 문을 달아 두었는데 두폭 짜리가 2개 모두 4폭이 된다. 이 문은 한쪽을 열어서 밑을 들어 매달면 마루와 방이 하나의 큰공간이 되어 버린다. 문중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그러나 이 문을 닫으면 온돌방은 아늑한 공간으로 변하고 당주(堂主)는 따뜻하게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된다. 대청 마루의 정면과 우측의 각 칸에는 2분합 여닫이문을 달아 두었다. 문살은 촘촘하게 살을 만든 띠살문이다. 마루의 뒤쪽 2칸에는 2분합 골판문을 달았는데 골판문이란 널찍한 문살에 얇은 판자를 유리처럼 끼운 것을 말한다. 이 쌍청당은 다른 주택 건축에서 볼 수 없는 단청(丹靑)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우리나라에서 단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단청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습기나 벌레로부터 목재를 보호하여 건물의 수명을 길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단청은 고구려 고분에서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고, 신라 시대에는 금, 은으로 현란하게 장식하여 나라에서 엄격히 금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단청이 아주 유행하여 나중에는 일반 민가에서도 돈만 있으면 너도나도 단청 칠을 하게 되었다. 단청 원료는 중국에서 수입해 쓰는 형편이므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비싼 고급 장식재였다. 이러한 사치를 보다못해 세종11년 공조에 명하여 [공사옥우(公私屋宇)에는 주칠(朱漆)을 물용(勿用)케 하라]고 하였다. 이후부터는 일체 단청을 못하도록 했던 적이 있었다. 그후 문종 때 모든 건물에 주칠을 금하였던 것을 완화하여 관청과 사찰, 사당만은 제외하기도 하였다. 예종 원년에 만든 법령집 [경국대전]에 보면 "사찰 이외에 단청(眞彩)을 사용하는 자는 곤장 80대의형에 처한다"라는 법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 쌍청당은 이미 법령이 정해지기 전에 세웠던 건물이므로 이 규제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단청은 다시 칠한 것이지만 민가에 이같이 단청이 되어 있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것이다.

쌍청당이 특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시의 건축미학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근처에 많이 남아있는 이와 유사한 별당건축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만들었다는 것은 곧 하나의 모범적인 형태였다는 것이다. 비록 이 지방의 것은 아니지만 별당건축으로서 유명한 것은 강릉의 활래정, 해운정, 월성의 무첨당, 안동의 임청각, 군자정, 달성의 태고정 등이다. 유독 쌍청당 주위에 이러한 별당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송준길의 동춘당, 김경여의 송애당,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기국정, 송규렴이 현종 때 지은 제월당 등이 바로 이웃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쌍청당이고, 그러기에 별당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 유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