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선생 고택(同春先生 古宅)
카테고리
전통건축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61
동춘선생 고택(同春先生 古宅)
* 분 류 : 중요 민속문화재 289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192
* 수 량 : 4동(사랑채, 안채, 별묘, 가묘)
* 재 료 : 목조
* 연 대 : 조선 후기
* 개 요 : 별당인 동춘당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춘당을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넓게 트여 있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2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별당인 동춘당이 앞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마당이 넉넉한 사랑채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기호지방의 넓은 지형조건을 닮았는지 이 지방의 사대부 가옥은 대개가 이처럼 배치 구조에 여유가 있다. 기호학파의 학맥이 이곳에서 꽃을 피웠으니 어찌 보면 기호학의 종가라 해도 될 것이다. 배치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허술해 보이기도 하지만 영남지방의 사대부 가옥과는 달리 옹색하지가 않다. 텃밭도 널찍하고 뒷담도 널찍하다. 동춘당 주인 송준길은 이 텃밭에 손수 농사를 지음으로서 자연의 섭리와 농군의 심성을 헤아렸을 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대청이 놓이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배치되고 좌측 1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이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내외가 분명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반드시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구별해두고 그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이러한 법도가 지켜져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치고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공간의 내외질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내외담이 없었고 사랑채 뒤에 반침이 있어 내외담 역할을 하였는데 습해서 썩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나니 안채와 직통으로 통하여 할 수 없이 격담을 하였다고 한다. 정면 여섯 칸의 사랑채로는 동춘선생의 명성으로 보아 너무 작다. 더구나 행랑채가 없다면 말이다. 사랑채에서 대청, 중문칸, 아궁이 함실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세 칸의 방밖에 남지 않는다. 사랑채에서 할 일을 별당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사랑채면 보통의 사대부 가옥에도 못 미친다. 사랑채로서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랑채의 모습으로 인하여 송준길선생의 유가적(儒家的) 행적을 알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은 그를 일러 "천품(天品)이 절이(絶異)하고 정명온수(精明溫粹)하며 형철무하(瑩徹無瑕)하고 색이기화(色夷氣和)하여 보는 사람마다 심취케 한다"고 평했다.
동춘 선생의 지위로 보아 사랑채 앞쪽, 대문 옆으로 행랑채가 있을 법한데도 없다. 이 댁의 노복들은 어디에 거주했고 주인 행차에 따라온 노복들은 어디에 여장을 풀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다. 안채를 ' '자 모양으로 둘러 앉히고 그 가운데 마당을 둠으로서 소위 '중정식 주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뜰 집'이다. 이 마당은 우리와 같은 유교권에서 여성의 내향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안마당은 외부이면서 내부이고, 내부인 듯 하면서도 외부가 되는 것이다. 즉 안채의 기능이 안마당으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외부가 하나의 기능으로 통합이 된다. 가령 안마당에 천막을 치게되면 완벽한 내부공간이 되기도 한다. 영남지방의 안마당에 비해 이 지방의 안마당은 널찍하고 여유가 있다. 지리적 환경이 그 원인인 듯 하고, 한편으로 기호학파 학맥의 전통에도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이 안채는'ㄷ'자형 평면이며 3칸으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고 안방 뒤로는 골방이, 앞으로는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을 겸하여 동측으로는 안쪽에 건넌방, 부엌, 행랑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안주인이 기거하며 집안의 큰 일을 돌보는 곳이다.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강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도덕적 규범을 터득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채의 크기는 사랑채보다 훨씬 크다. 사랑채가 최소한의 기능만을 공간화 했다면 안채 역시 최소한의 기능을 공간화 하였다고 하겠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의 크기는 대개 이만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크다. 달리 말해 사랑채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집사치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대부가의 안채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바탕에 깔아둔 것 같다. 안마당이 넓음으로 안채를 특별히 사랑채보다 높이지 않아도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 좋다. 안대청에는 사분합을 달아 추운 기후에 대비토록 하였고 각 방의 기능을 연결하기 위해 마당 쪽으로는 좁은 퇴를 달아 연결시켜 놓았다. 한편 이 안대청 사분합은 들어열개로 되어 이를 들어올리면 안마당과 안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전용(專用)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집에는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별묘(別廟)로서 동춘선생의 신위를 모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묘(家廟)로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둘 다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앞쪽에 퇴칸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묘(祠廟)는 반드시 구역 내에서 약간 뒤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배치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규범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묘는 혈족을 중심으로 동족선조를 봉사(奉祀)하는 보본(報本)의 본능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혈족의 차원을 벗어날 때 문묘, 종묘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사묘(祠廟)는 유교권에서 현저히 발전되어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 공간은 선조에 대한 경애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경(敬)의 공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공간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동춘선생의 별묘는 그의 학덕을 길이 숭앙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다. 이렇듯 별묘는 국가에서 공신의 위패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한 것이기에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사묘에 한해 조정에서는 격조 높은 두리기둥과 단청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기둥에다 단청도 하지 않아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이러한 별묘는 이외에도 몇몇 사대부가에 설치되어 있다. 동춘당과 고택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자태와 같이 단아하며 품위가 있다. 여느 지방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요란함과 호화로움이 없고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는 검소함이며,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의 심성은 곧 기호학 맥의 본연인 듯 싶다. 이와 같이 이 지방의 사대부 집에 나타난 선비의 생각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으며 이 집에서 다시 기호학파의 큰 줄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속의 집, 집 속에 자연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며 특히 이 고택에서는 입지조건이 옹색하지 않고, 건물의 배치가 여유로워 안마당이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근접을 피한 별당의 배치 등에서 기호지방의 반가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 분 류 : 중요 민속문화재 289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192
* 수 량 : 4동(사랑채, 안채, 별묘, 가묘)
* 재 료 : 목조
* 연 대 : 조선 후기
* 개 요 : 별당인 동춘당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춘당을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넓게 트여 있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2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별당인 동춘당이 앞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대청이 놓이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배치되고 좌측 1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이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내외가 분명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반드시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구별해두고 그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이러한 법도가 지켜져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치고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공간의 내외질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내외담이 없었고 사랑채 뒤에 반침이 있어 내외담 역할을 하였는데 습해서 썩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나니 안채와 직통으로 통하여 할 수 없이 격담을 하였다고 한다. 정면 여섯 칸의 사랑채로는 동춘선생의 명성으로 보아 너무 작다. 더구나 행랑채가 없다면 말이다. 사랑채에서 대청, 중문칸, 아궁이 함실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세 칸의 방밖에 남지 않는다. 사랑채에서 할 일을 별당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사랑채면 보통의 사대부 가옥에도 못 미친다. 사랑채로서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랑채의 모습으로 인하여 송준길선생의 유가적(儒家的) 행적을 알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은 그를 일러 "천품(天品)이 절이(絶異)하고 정명온수(精明溫粹)하며 형철무하(瑩徹無瑕)하고 색이기화(色夷氣和)하여 보는 사람마다 심취케 한다"고 평했다.
동춘 선생의 지위로 보아 사랑채 앞쪽, 대문 옆으로 행랑채가 있을 법한데도 없다. 이 댁의 노복들은 어디에 거주했고 주인 행차에 따라온 노복들은 어디에 여장을 풀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다. 안채를 ' '자 모양으로 둘러 앉히고 그 가운데 마당을 둠으로서 소위 '중정식 주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뜰 집'이다. 이 마당은 우리와 같은 유교권에서 여성의 내향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안마당은 외부이면서 내부이고, 내부인 듯 하면서도 외부가 되는 것이다. 즉 안채의 기능이 안마당으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외부가 하나의 기능으로 통합이 된다. 가령 안마당에 천막을 치게되면 완벽한 내부공간이 되기도 한다. 영남지방의 안마당에 비해 이 지방의 안마당은 널찍하고 여유가 있다. 지리적 환경이 그 원인인 듯 하고, 한편으로 기호학파 학맥의 전통에도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이 안채는'ㄷ'자형 평면이며 3칸으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고 안방 뒤로는 골방이, 앞으로는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을 겸하여 동측으로는 안쪽에 건넌방, 부엌, 행랑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안주인이 기거하며 집안의 큰 일을 돌보는 곳이다.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강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도덕적 규범을 터득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채의 크기는 사랑채보다 훨씬 크다. 사랑채가 최소한의 기능만을 공간화 했다면 안채 역시 최소한의 기능을 공간화 하였다고 하겠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의 크기는 대개 이만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크다. 달리 말해 사랑채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집사치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대부가의 안채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바탕에 깔아둔 것 같다. 안마당이 넓음으로 안채를 특별히 사랑채보다 높이지 않아도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 좋다. 안대청에는 사분합을 달아 추운 기후에 대비토록 하였고 각 방의 기능을 연결하기 위해 마당 쪽으로는 좁은 퇴를 달아 연결시켜 놓았다. 한편 이 안대청 사분합은 들어열개로 되어 이를 들어올리면 안마당과 안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전용(專用)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집에는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별묘(別廟)로서 동춘선생의 신위를 모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묘(家廟)로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둘 다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앞쪽에 퇴칸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묘(祠廟)는 반드시 구역 내에서 약간 뒤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배치하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규범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묘는 혈족을 중심으로 동족선조를 봉사(奉祀)하는 보본(報本)의 본능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혈족의 차원을 벗어날 때 문묘, 종묘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 사묘(祠廟)는 유교권에서 현저히 발전되어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 공간은 선조에 대한 경애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경(敬)의 공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공간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동춘선생의 별묘는 그의 학덕을 길이 숭앙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다. 이렇듯 별묘는 국가에서 공신의 위패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한 것이기에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사묘에 한해 조정에서는 격조 높은 두리기둥과 단청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각기둥에다 단청도 하지 않아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이러한 별묘는 이외에도 몇몇 사대부가에 설치되어 있다. 동춘당과 고택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자태와 같이 단아하며 품위가 있다. 여느 지방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요란함과 호화로움이 없고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는 검소함이며,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의 심성은 곧 기호학 맥의 본연인 듯 싶다. 이와 같이 이 지방의 사대부 집에 나타난 선비의 생각은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으며 이 집에서 다시 기호학파의 큰 줄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속의 집, 집 속에 자연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며 특히 이 고택에서는 입지조건이 옹색하지 않고, 건물의 배치가 여유로워 안마당이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근접을 피한 별당의 배치 등에서 기호지방의 반가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