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년(姜栢年)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6
강백년(姜栢年)
* 자(字) : 숙구(叔久)
* 호(號) :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
* 년 대 : 1603년(선조36) - 1681년(숙종7)
* 관 직 : 대사간(15회), 대사헌(9회), 지신사(6회), 대사성(4회), 예조판서(2회)
* 증 직 : 영의정
* 문 집 : 설봉집
* 거 주 지 : 회덕 잔골(자운리, 석봉동)
* 묘 소 : 공주 의랑리 도리산
강백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은열공 강민첨의 후손이며, 효자로 정려를 받은 강운상의 손자이고, 죽창 강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응서의 딸인데 그가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아버지 죽창공이 기르면서 글을 가르쳐 15세 때에 향시에 급제하였다. 25세 때에는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언·장령을 지냈고, 1646년 소현세자빈(강빈)이 인조 독살기도의 혐의로 처형된, 이른 바 강빈옥사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비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그러나 다시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동부승지에 올랐고, 다음 해에 향교를 부흥시킬 것을 상소하여 전국적으로 향교가 크게 부흥되게 하였다. 1648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다시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는 주로 삼사와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직언으로 정론을 폈고, 청풍군수, 강릉부사와 충청·황해·경기감사 등 외직도 두루 역임하였는데, 특히 청풍군수 때에는 어사가 그의 청백함과 백성 사랑함을 효종에게 아뢰니 왕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렸고, 충청감사 때에는 호서에서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을 잘 처리하여 호서인의 칭송을 받았다. 1660년(현종1)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강백년은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예조판서를 두 번이나 역임했고, 예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후일 청나라가 자국 황후의 상사(喪事)를 입고 모두 슬퍼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따르려 하였으나, 강백년이 "이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여 이를 철회케 하였다.
강백년은 조정에 출사 한지 55년 동안 다양한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중앙직 만으로도 대사간, 대사헌, 지신사, 대사성, 예조판서 등을 들 수 있다.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1690년(숙종16)에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그 뒤에 청백사로 선록 되었다. 강백년은 기질이 청명하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효우가 돈독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장은 일세의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겸손하여 이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대학을 한번 외우고, 염락(濂洛)의 책들을 항상 몸에 지녀서 따로 이름 짓기를 『한계만록』이라 하고, 심학의 중요한 말과 고금의 가언, 선행, 대학 8조목 등에 대한 견해를 펴서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항상 말하기를, "평생에 큰 허물이 없는 것은 모두 이 책의 공이다."라 하였다.
세상적인 향락을 일체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치닫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고하게 스스로를 구별하여 혹시라도 자신을 더럽힐까 조심하였으며, 평생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 사는 곳이 비록 초가집 두어 칸에 풍우를 가릴 수도 없고, 맨밥과 거친 밥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궁핍한 선비와 같아서 벼슬과 명망이 높은 관원이었음을 알지 못한 듯하였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구들을 견디기 어려움에도 눈을 붙이며 편안한 듯 처해서 말하기를, "내 사는 것은 비록 괴로우나 요격하고 순찰하는 졸개에 비하면 편안하다." 라 하였다. 기쁘고 노여움을 발하는 것을 반드시 삼가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고, 시국 정치를 논하지 않았다. 상스러운 말과 조소하고 해학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에 이르면 웃으면서 그것에 응해서 더불어 다투지 않았다. 집사람들이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따스하게 일깨워서 소리 내고 성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자제를 가르침에 반드시 지조 있는 행동을 앞세워서 말하기를 "과거 보는 일은 밖의 일이다. 선비는 마땅히 충효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친 죽창공이 나이 80세를 넘자, 강백년은 부친을 조석으로 정성껏 섬기고 뜻을 받드는 일에 충실했다.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슬퍼하기를 지극히 하였고, 곡하는 나머지 시간은 오직 예서를 읽을 뿐이었다. 제삿날을 맞아서는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처음과 같이 해서 비록 늙고 피곤해도 제사를 반드시 친히 하고 자손으로 하여금 대신하지 않았다. 형님과 더불어 화목하여서 한 몸과 같이 하였고, 누님을 잘 섬겨서 진귀한 것을 하나 얻으면 나누어 맛보게 하였다. 여러 조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식과 같이 하였고,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도 풍속을 따라 잔치를 베푸는 행사를 하지 않고, 겸손하고 억제하는 뜻을 보였다.
문집으로는 『설봉집』이 있다. 온양의 정퇴서원, 수안의 용계서원, 청주의 기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자(字) : 숙구(叔久)
* 호(號) :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
* 년 대 : 1603년(선조36) - 1681년(숙종7)
* 관 직 : 대사간(15회), 대사헌(9회), 지신사(6회), 대사성(4회), 예조판서(2회)
* 증 직 : 영의정
* 문 집 : 설봉집
* 거 주 지 : 회덕 잔골(자운리, 석봉동)
* 묘 소 : 공주 의랑리 도리산
강백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은열공 강민첨의 후손이며, 효자로 정려를 받은 강운상의 손자이고, 죽창 강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응서의 딸인데 그가 3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아버지 죽창공이 기르면서 글을 가르쳐 15세 때에 향시에 급제하였다. 25세 때에는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언·장령을 지냈고, 1646년 소현세자빈(강빈)이 인조 독살기도의 혐의로 처형된, 이른 바 강빈옥사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비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그러나 다시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동부승지에 올랐고, 다음 해에 향교를 부흥시킬 것을 상소하여 전국적으로 향교가 크게 부흥되게 하였다. 1648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다시 강빈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는 주로 삼사와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직언으로 정론을 폈고, 청풍군수, 강릉부사와 충청·황해·경기감사 등 외직도 두루 역임하였는데, 특히 청풍군수 때에는 어사가 그의 청백함과 백성 사랑함을 효종에게 아뢰니 왕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렸고, 충청감사 때에는 호서에서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을 잘 처리하여 호서인의 칭송을 받았다. 1660년(현종1)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강백년은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예조판서를 두 번이나 역임했고, 예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후일 청나라가 자국 황후의 상사(喪事)를 입고 모두 슬퍼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것을 따르려 하였으나, 강백년이 "이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여 이를 철회케 하였다.
강백년은 조정에 출사 한지 55년 동안 다양한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중앙직 만으로도 대사간, 대사헌, 지신사, 대사성, 예조판서 등을 들 수 있다.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1690년(숙종16)에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그 뒤에 청백사로 선록 되었다. 강백년은 기질이 청명하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효우가 돈독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장은 일세의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겸손하여 이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대학을 한번 외우고, 염락(濂洛)의 책들을 항상 몸에 지녀서 따로 이름 짓기를 『한계만록』이라 하고, 심학의 중요한 말과 고금의 가언, 선행, 대학 8조목 등에 대한 견해를 펴서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는데, 항상 말하기를, "평생에 큰 허물이 없는 것은 모두 이 책의 공이다."라 하였다.
세상적인 향락을 일체 좋아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치닫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고고하게 스스로를 구별하여 혹시라도 자신을 더럽힐까 조심하였으며, 평생토록 첩을 두지 않았다. 사는 곳이 비록 초가집 두어 칸에 풍우를 가릴 수도 없고, 맨밥과 거친 밥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궁핍한 선비와 같아서 벼슬과 명망이 높은 관원이었음을 알지 못한 듯하였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구들을 견디기 어려움에도 눈을 붙이며 편안한 듯 처해서 말하기를, "내 사는 것은 비록 괴로우나 요격하고 순찰하는 졸개에 비하면 편안하다." 라 하였다. 기쁘고 노여움을 발하는 것을 반드시 삼가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고, 시국 정치를 논하지 않았다. 상스러운 말과 조소하고 해학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에 이르면 웃으면서 그것에 응해서 더불어 다투지 않았다. 집사람들이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따스하게 일깨워서 소리 내고 성내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자제를 가르침에 반드시 지조 있는 행동을 앞세워서 말하기를 "과거 보는 일은 밖의 일이다. 선비는 마땅히 충효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친 죽창공이 나이 80세를 넘자, 강백년은 부친을 조석으로 정성껏 섬기고 뜻을 받드는 일에 충실했다.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슬퍼하기를 지극히 하였고, 곡하는 나머지 시간은 오직 예서를 읽을 뿐이었다. 제삿날을 맞아서는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처음과 같이 해서 비록 늙고 피곤해도 제사를 반드시 친히 하고 자손으로 하여금 대신하지 않았다. 형님과 더불어 화목하여서 한 몸과 같이 하였고, 누님을 잘 섬겨서 진귀한 것을 하나 얻으면 나누어 맛보게 하였다. 여러 조카들을 어루만지기를 자식과 같이 하였고,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도 풍속을 따라 잔치를 베푸는 행사를 하지 않고, 겸손하고 억제하는 뜻을 보였다.
문집으로는 『설봉집』이 있다. 온양의 정퇴서원, 수안의 용계서원, 청주의 기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