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년(姜鶴年)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23
강학년(姜鶴年)
* 자(字) : 자구(子久)
* 호(號) : 복천(復泉), 자운(紫雲)
* 년 대 : 1585년(선조18) - 1647년(인조25)
* 관 직 : 진천 현감, 세자익위사 사어, 장령
* 증 직 : 이조판서
* 출 생 지 : 서천 한산
* 거 주 지 : 회덕 잔골(자운리, 석봉동)
* 유 적 : 본가 터(석봉동)
* 묘 소 : 충남 온양
강학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복천(復泉), 자운(紫雲)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효자 강운상의 손자이고 대사간 강첨의 아들이다. 그는 외가인 서천군 한산 숭문동에서 출생하여 13세 때에 본가인 회덕 잔골로 돌아왔는데, 복천 또는 자운이라는 호는 그의 출생 설화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 한산에 있는 고갈된 샘과 어머니 한산이씨가 그를 잉태했을 때 말라 버렸던 이곳 잔골(석봉동)의 샘이 솟구쳤다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붉은 구름이 집을 에워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석봉동 잔골에는 그의 본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안채가 슬래브 집으로 개축되었으나 당시의 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 몇 개와 일부의 목재가 다시 사용되었다.
강학년은 25세(광해군1, 1609)때 생원이 되었으나 병이 많아서 출사하지 아니하고 성인의 학문에 침잠하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정치가 문란한데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므로 고향에서 농사를 지며 어머니를 섬기면서 숨어 살았다. 인조반정(1623)후 최명길의 천거로 연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에 그는 천안으로 가서 왕을 맞이했으며, 이때 진천 현감이 되었으나 수개월 후 다시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이듬해 세자익위사 사어(司禦, 종5품)가 되었다.
강학년은 1627년 후금이 침입하여 조정에서 화의를 논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돌아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음을 상소하였다. 또 1643년 장령이 되었을 때, 공신들에 의한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어 은진으로 귀양 가서 1년 만에 본가로 돌아왔다. 그 뒤 10년을 더 살다가 1647년(인조25) 63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 후 1654년(효종5) 특진관 홍명하의 상소로 신원되었고,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일생 동안 청빈하였고, 의를 내세워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회덕 용호사와 온양의 정퇴 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충남 온양에 있다.
* 자(字) : 자구(子久)
* 호(號) : 복천(復泉), 자운(紫雲)
* 년 대 : 1585년(선조18) - 1647년(인조25)
* 관 직 : 진천 현감, 세자익위사 사어, 장령
* 증 직 : 이조판서
* 출 생 지 : 서천 한산
* 거 주 지 : 회덕 잔골(자운리, 석봉동)
* 유 적 : 본가 터(석봉동)
* 묘 소 : 충남 온양
강학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복천(復泉), 자운(紫雲)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효자 강운상의 손자이고 대사간 강첨의 아들이다. 그는 외가인 서천군 한산 숭문동에서 출생하여 13세 때에 본가인 회덕 잔골로 돌아왔는데, 복천 또는 자운이라는 호는 그의 출생 설화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 한산에 있는 고갈된 샘과 어머니 한산이씨가 그를 잉태했을 때 말라 버렸던 이곳 잔골(석봉동)의 샘이 솟구쳤다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붉은 구름이 집을 에워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석봉동 잔골에는 그의 본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안채가 슬래브 집으로 개축되었으나 당시의 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 몇 개와 일부의 목재가 다시 사용되었다.
강학년은 25세(광해군1, 1609)때 생원이 되었으나 병이 많아서 출사하지 아니하고 성인의 학문에 침잠하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정치가 문란한데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므로 고향에서 농사를 지며 어머니를 섬기면서 숨어 살았다. 인조반정(1623)후 최명길의 천거로 연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에 그는 천안으로 가서 왕을 맞이했으며, 이때 진천 현감이 되었으나 수개월 후 다시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이듬해 세자익위사 사어(司禦, 종5품)가 되었다.
강학년은 1627년 후금이 침입하여 조정에서 화의를 논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돌아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음을 상소하였다. 또 1643년 장령이 되었을 때, 공신들에 의한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어 은진으로 귀양 가서 1년 만에 본가로 돌아왔다. 그 뒤 10년을 더 살다가 1647년(인조25) 63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 후 1654년(효종5) 특진관 홍명하의 상소로 신원되었고,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다. 일생 동안 청빈하였고, 의를 내세워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회덕 용호사와 온양의 정퇴 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충남 온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