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강 혼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33
강 혼

 

() : 사호(士浩)

() : 목계(木溪)

년 대 : 1464(세조10) - 1519(중종14)

관 직 좌승지대제학공조판서한성부판윤판중추부사우찬성

거 주 지 회덕 잔골(자운리석봉동)

문 집 목계집

묘 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강혼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호는 목계(木溪), 본관은 진주이다아버지는 강인범이며김종직의 문인이다현존하는 <회덕향안>에 강혼은 '유학'과 '학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그는 출사하기 전에 이미 회덕의 향원으로 인정받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혼은 20세가 되던 해인 1484(성종14) 생원시에 장원하고, 23세 때(1486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함으로써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그러나 1498(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강혼은 무오사화에서 사림파의 일원이라 하여 심한 고역을 치르기는 하였으나얼마 가지 않아서 곧 방면될 수 있었다그는 특히 시문에 뛰어나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고도승지로서 왕을 가까이 보필하였는데당시에 "文名이 김일손 다음이다."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혼은 명리를 지나치게 탐내고연산군 말년 애희(愛姬)의 죽음을 슬퍼한 왕을 대신하여 궁인애사(宮人哀詞)와 제문을 지은 뒤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1506(연산군12) 중종반정 세력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 세력에 나아가 사죄한 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으로 진천군에 봉해졌다그 후 그는 좌승지를 거쳐대제학·공조판서를 거쳐 1512(중종7) 한성부판윤이 되었고이어 숭록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반정 후 강혼은 이윤으로부터 폐조의 행신이라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세조 정권에 의해 파헤쳐져 물가에 매장된 소릉(문종왕비 권씨)의 회복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현릉에 합장케 하는 등 사림 정신에 부합되는 주목할 만한 행동을 이루었다저서는 『목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