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여(金慶餘)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67
김경여(金慶餘)
* 자(字) : 유선(由善)
* 호(號) : 송애(松崖)
* 년 대 : 1596년(선조29) - 1653년(효종4)
* 관 직 : 직장, 주부, 부여현감,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대사간
* 증 직 : 좌찬성
* 출 생 지 : 회덕 송촌(백달촌, 중리동)
* 유 적 : 송애당(대덕구 중리동)
* 저 서 : 송애집
* 묘 소 :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김경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송애(松崖), 본관은 경주이다. 1596년 12월 9일 회덕현 백달촌의 외가인 송남수의 집에서 태어났다. 김경여는 김광유와 송씨 부인(송남수의 딸) 사이의 유복자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송씨 부인의 훈도를 받았다. 일찍이 김광유가 사서 육경으로써 부인에게 부탁하여 전가지물(傳家之物)로 삼았으므로, 김경여는 이 책자들을 다 물려받아서 선업을 이어 받았다.
15세에 연평 부원군 이귀의 사위가 되었고, 그 해 외가에서 나와 송촌에서 새 가정을 이루었다. 이듬해 가을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는데, 20세 때에는 진사초시에 장원하였다.
김경여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인 1623년 봄에 상경하여 장인 이귀로부터 거사의 권유를 받았으나, "거사는 이윤과 같은 뜻이 없으면 불가합니다. 외생 한 사람이 그 일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닌 지요"라고 사양하고는 곧 낙향하여 버렸다. 이후 거사는 성공하였고, 이듬해 그는 사축별좌로 출사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진취에 뜻이 없었으나, 친노가빈(親老家貧)하여 부득이 출사한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원종 1등 공신을 받고서 노모를 모시고 상경한 후 직장·주부·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36세 때에 스승 김장생이 졸하자 스승을 위해 3월복을 입어 예를 다하였다. 1632년 세자익위사 익위에 있을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경여는 이조정랑 겸 독전어사가 되어 왕을 호종,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여 일간을 성심으로 분투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청과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김경여는 오랑캐에 당한 굴욕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노모를 모시고서 다시 회덕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응교·집의 등에 임명되고 또 심양 서장관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도 부임하지 않았고 금교찰방에 제수하여도 불응하자 불사율로서 치죄하여 본역에 귀양 보냈으나, 이듬해 사면되어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경여는 백달촌에 별당인 송애당을 짓고 여기에서 기거하면서 곧은 뜻을 지켜가고자 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로 그를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등장하면서 조정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북벌을 염두에 둔 효종이 산림을 우대하는 정책을 과감히 폈던 관계로 효종 초에는 현신들이 대거 조정에 모여들었다. 김경여도 1649년 다시 출사하여 대사간을 제수 받고 이른 바 <육조소(六條疏)>를 올려 새로운 정치를 촉구하였다. 김경여가 김상헌·김집·송준길·송시열·이유태 등과 뜻을 함께 하여 공신계 김자점의 축출에 앞장섰던 것도 이러한 그의 북벌·내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과 결탁하여 횡포를 일삼던 김자점을 '전권오국지죄'로서 탄핵하여 축출시키는 데 앞장서서 성공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춘추대의를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651년(효종1)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군사력을 배양하는 일에 정력을 쏟았다.
이어서 김경여는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마침내 병세가 급해져 운명하기 직전에 아들 진수를 불러 효종에게 드리는 유소를 초하였다. 그 요지는 지금의 제일의 급무는 상실된 대의를 밝혀 강산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허성 실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으로, 이는 효종의 북벌 의지를 두고 말한 의미심장한 권면이었다. 그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효종 자신이 성지를 굳건히 하고, 성학에 힘쓰고, 현신을 가까이하여, 내수성도 함으로써 인심과 천명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현신을 구하는 도는 산림의 중용과 대우에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죽음에 직면해서까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김경여의 충성된 신하의 자세는 후일의 귀감이 됨직하다.
김경여는 품성이 고고하고 기력이 왕성했으며, 풍채와 정신이 빼어나 높은 산악 같은 기상이 있었고, 출처와 의리가 분명하였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회덕의 정절 서원에 봉향 되었고, 저서로는 『송애집』이 있다. 묘소는 연기군 동면에 있고,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는 그의 별당인 송애당이 현전하고 있다.
* 자(字) : 유선(由善)
* 호(號) : 송애(松崖)
* 년 대 : 1596년(선조29) - 1653년(효종4)
* 관 직 : 직장, 주부, 부여현감,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대사간
* 증 직 : 좌찬성
* 출 생 지 : 회덕 송촌(백달촌, 중리동)
* 유 적 : 송애당(대덕구 중리동)
* 저 서 : 송애집
* 묘 소 :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김경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송애(松崖), 본관은 경주이다. 1596년 12월 9일 회덕현 백달촌의 외가인 송남수의 집에서 태어났다. 김경여는 김광유와 송씨 부인(송남수의 딸) 사이의 유복자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송씨 부인의 훈도를 받았다. 일찍이 김광유가 사서 육경으로써 부인에게 부탁하여 전가지물(傳家之物)로 삼았으므로, 김경여는 이 책자들을 다 물려받아서 선업을 이어 받았다.
15세에 연평 부원군 이귀의 사위가 되었고, 그 해 외가에서 나와 송촌에서 새 가정을 이루었다. 이듬해 가을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는데, 20세 때에는 진사초시에 장원하였다.
김경여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인 1623년 봄에 상경하여 장인 이귀로부터 거사의 권유를 받았으나, "거사는 이윤과 같은 뜻이 없으면 불가합니다. 외생 한 사람이 그 일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닌 지요"라고 사양하고는 곧 낙향하여 버렸다. 이후 거사는 성공하였고, 이듬해 그는 사축별좌로 출사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진취에 뜻이 없었으나, 친노가빈(親老家貧)하여 부득이 출사한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원종 1등 공신을 받고서 노모를 모시고 상경한 후 직장·주부·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36세 때에 스승 김장생이 졸하자 스승을 위해 3월복을 입어 예를 다하였다. 1632년 세자익위사 익위에 있을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경여는 이조정랑 겸 독전어사가 되어 왕을 호종,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여 일간을 성심으로 분투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청과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김경여는 오랑캐에 당한 굴욕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노모를 모시고서 다시 회덕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응교·집의 등에 임명되고 또 심양 서장관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도 부임하지 않았고 금교찰방에 제수하여도 불응하자 불사율로서 치죄하여 본역에 귀양 보냈으나, 이듬해 사면되어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경여는 백달촌에 별당인 송애당을 짓고 여기에서 기거하면서 곧은 뜻을 지켜가고자 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로 그를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등장하면서 조정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북벌을 염두에 둔 효종이 산림을 우대하는 정책을 과감히 폈던 관계로 효종 초에는 현신들이 대거 조정에 모여들었다. 김경여도 1649년 다시 출사하여 대사간을 제수 받고 이른 바 <육조소(六條疏)>를 올려 새로운 정치를 촉구하였다. 김경여가 김상헌·김집·송준길·송시열·이유태 등과 뜻을 함께 하여 공신계 김자점의 축출에 앞장섰던 것도 이러한 그의 북벌·내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과 결탁하여 횡포를 일삼던 김자점을 '전권오국지죄'로서 탄핵하여 축출시키는 데 앞장서서 성공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춘추대의를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651년(효종1)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군사력을 배양하는 일에 정력을 쏟았다.
이어서 김경여는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마침내 병세가 급해져 운명하기 직전에 아들 진수를 불러 효종에게 드리는 유소를 초하였다. 그 요지는 지금의 제일의 급무는 상실된 대의를 밝혀 강산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허성 실화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으로, 이는 효종의 북벌 의지를 두고 말한 의미심장한 권면이었다. 그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효종 자신이 성지를 굳건히 하고, 성학에 힘쓰고, 현신을 가까이하여, 내수성도 함으로써 인심과 천명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현신을 구하는 도는 산림의 중용과 대우에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죽음에 직면해서까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김경여의 충성된 신하의 자세는 후일의 귀감이 됨직하다.
김경여는 품성이 고고하고 기력이 왕성했으며, 풍채와 정신이 빼어나 높은 산악 같은 기상이 있었고, 출처와 의리가 분명하였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회덕의 정절 서원에 봉향 되었고, 저서로는 『송애집』이 있다. 묘소는 연기군 동면에 있고,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는 그의 별당인 송애당이 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