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金震粹)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5
김진수(金震粹)
* 자(字) : 회숙(晦叔)
* 년 대 : 1622년(광해군14) - 1673년(현종14)
* 관 직 : 금부도사, 과천현감, 아산현감, 안음현감
* 거 주 지 : 회덕 송촌(백달촌, 중리동)
* 묘 소 : 충남 연기 가림동 부감
김진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송애 김경여의 아들이다. 12세에 부친의 권유로 여강 촌사에 머물고 있던 헌납 송몽석에게 나아가 배웠다. 하루는 밝은 달밤에 송몽석이 배우는 아이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였는데, 이때 그는 "별들의 진영에는 달이 장수이다."라는 시를 지어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중에 부친 김경여는 독전어사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이때 김진수도 아버지를 따라 함께 갔다. 그러나 화의가 성립되자 김경여가 온 집안을 이끌고 회덕으로 돌아올 때 함께 와서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여기에서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송준길의 문하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였다.
1652년(효종3) 아버지 김경여의 병이 깊어가자 그는 의원을 데려오고 약을 구하러 가는 때 외에는 아버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하여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생전에 조부의 묘가 남의 산에 모셔져 있음을 늘 애통해하면서도 이장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아버지가 생각하시던 땅을 구입하여 부, 조부모를 모두 이곳으로 이장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이루었다.
김진수는 1662년(현종3) 비로소 내시교관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한양에 가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신을 모시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사산감역의·금부도사·과천현감·아산현감·안음현감 등을 맡았는데, 과천현감 때에는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을 지성으로 구휼하였고, 아산 현감 때에는 선정의 소문이 자자하였으나 정사가 엄격함에 교활한 무리가 참소하여 관직을 그만두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곧 안음 현감이 되어 다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호족을 억압하는 노력을 기울이자, 전일 아산 현감 때의 감사는 전날의 문제가 참소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그의 시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한다. 이후 김진수는 한양의 군직에 보하여졌으나, 세상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관직을 버리고 회덕으로 낙향, 자제들과 함께 경치를 즐기며 조용히 보내다가 향년 52세로 생애를 마쳤다.
김진수는 원래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의리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한 사람
* 자(字) : 회숙(晦叔)
* 년 대 : 1622년(광해군14) - 1673년(현종14)
* 관 직 : 금부도사, 과천현감, 아산현감, 안음현감
* 거 주 지 : 회덕 송촌(백달촌, 중리동)
* 묘 소 : 충남 연기 가림동 부감
김진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송애 김경여의 아들이다. 12세에 부친의 권유로 여강 촌사에 머물고 있던 헌납 송몽석에게 나아가 배웠다. 하루는 밝은 달밤에 송몽석이 배우는 아이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였는데, 이때 그는 "별들의 진영에는 달이 장수이다."라는 시를 지어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중에 부친 김경여는 독전어사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이때 김진수도 아버지를 따라 함께 갔다. 그러나 화의가 성립되자 김경여가 온 집안을 이끌고 회덕으로 돌아올 때 함께 와서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여기에서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송준길의 문하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였다.
1652년(효종3) 아버지 김경여의 병이 깊어가자 그는 의원을 데려오고 약을 구하러 가는 때 외에는 아버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하여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생전에 조부의 묘가 남의 산에 모셔져 있음을 늘 애통해하면서도 이장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아버지가 생각하시던 땅을 구입하여 부, 조부모를 모두 이곳으로 이장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이루었다.
김진수는 1662년(현종3) 비로소 내시교관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한양에 가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신을 모시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사산감역의·금부도사·과천현감·아산현감·안음현감 등을 맡았는데, 과천현감 때에는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을 지성으로 구휼하였고, 아산 현감 때에는 선정의 소문이 자자하였으나 정사가 엄격함에 교활한 무리가 참소하여 관직을 그만두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곧 안음 현감이 되어 다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호족을 억압하는 노력을 기울이자, 전일 아산 현감 때의 감사는 전날의 문제가 참소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어 그의 시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한다. 이후 김진수는 한양의 군직에 보하여졌으나, 세상사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관직을 버리고 회덕으로 낙향, 자제들과 함께 경치를 즐기며 조용히 보내다가 향년 52세로 생애를 마쳤다.
김진수는 원래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의리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