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집(盧輯)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9
노 집(盧輯)
* 자(字) : 사화(士和)
* 호(號) : 낙헌(樂軒)
* 년 대 : 1489년(성종20) - 1536년(중종31)
* 관 직 : 의령고 주부, 선공감 주부,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
* 활 동 지 : 회덕(회덕향안 수록 인물)
* 묘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
노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낙헌(樂軒), 본관은 신창이다. 노집은 1489년(성종20) 아버지 노미수(건공장군 충무위 부사직)와 어머니 유씨 부인(남원현감 유석번의 딸)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신창노씨 회덕입향조는 노규부(어모장군 훈련원 습독관)인데, 노집은 그의 손자가 된다. 노규부의 묘소는 구 회덕의 문지동에 있고, 후손들이 그 아래에서 세거하여 왔다. 이후 신창노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펴냄으로써 이들 종족의 역사를 있게 한 인물은 회덕 출신으로 부장을 지낸 노식이다. 노식은 노집의 형이다.
이들 신창노씨들은 일찍부터 회덕의 재지사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노집은 역대 <회덕향안>에 수록된 노성(盧性) 인물 중 생몰 연대가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노성은 우암 송시열이 쓴 <회덕향안>의 서문에 나오는 회덕의 저명한 성씨(13姓) 중의 하나이고, <임자본 향안>에는 노姓의 향원 10인이 등록되어져 있다.
노집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였고, 자라면서 언행을 삼가고 무겁게 하였다. 그의 나이 38세가 되던 해인 1526년(중종21)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조회나 제사 등의 의식을 관장하는 통예원의 인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의령고 주부·선공감 주부 등을 거쳐, 지방 수령인 단성현감(종6품)이 되었다. 그가 단성현감이 되었을 때, 마침 영남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나, 그는 백성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하였으므로 온 지방이 다 그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성의 관청이 실화됨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곧바로 복직되어 조지서사지가 되었으나,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회덕으로 낙향하였다.
노집이 고향에 돌아와서 어떤 삶을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나이 46세 때인 1534년(중종29) 3월에 자신이 지은 「구곡정기」에 잘 나타나 있다. 노집은 예에 대한 식견이 밝고 예의식이 투철하며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관료로 있을 때는 국가의 예의식을 주관하는 통예원에서 일한 바가 있었거니와, 관직을 떠나 낙향하여서도 정자를 짓되 단순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3년간 집상하던 곳에다가 정자를 지어 형제간의 화목을 더욱 굳게 하려는 데에 더 큰 뜻을 담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향에 돌아와 예행을 즐기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노집은 48세가 되던 해 10월, 갑자기 병을 얻어 서울로 올라가 치료했으나 고치지 못하고, 그해 12월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노집은 성품이 온유하여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나 안으로는 강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고, 벼슬에 있음에 청렴의 명성이 있었다. 일가에 화목하고, 벗에게 신의가 있으며, 밖과 속이 한결같았고, 일을 처리함에 자세하고 민첩하며, 고전에 널리 통하여 국가에서 큰일이 있으면 홍로(통예원의 별칭)에서 반드시 그를 추천하여 일을 주장하게 하였다. 노집의 인물됨은 16세기 회덕의 대표적 명사인 규암 송인수가 지은 묘갈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노집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벼슬은 그의 덕의 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고, 특히 예에 밝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집은 자연히 당대의 회덕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는 한말에 심석 송병순이 찬한 「낙헌공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노집의 묘소는 현재 대전 유성구 문지동에 있다.
* 자(字) : 사화(士和)
* 호(號) : 낙헌(樂軒)
* 년 대 : 1489년(성종20) - 1536년(중종31)
* 관 직 : 의령고 주부, 선공감 주부,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
* 활 동 지 : 회덕(회덕향안 수록 인물)
* 묘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
노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낙헌(樂軒), 본관은 신창이다. 노집은 1489년(성종20) 아버지 노미수(건공장군 충무위 부사직)와 어머니 유씨 부인(남원현감 유석번의 딸)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신창노씨 회덕입향조는 노규부(어모장군 훈련원 습독관)인데, 노집은 그의 손자가 된다. 노규부의 묘소는 구 회덕의 문지동에 있고, 후손들이 그 아래에서 세거하여 왔다. 이후 신창노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펴냄으로써 이들 종족의 역사를 있게 한 인물은 회덕 출신으로 부장을 지낸 노식이다. 노식은 노집의 형이다.
이들 신창노씨들은 일찍부터 회덕의 재지사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노집은 역대 <회덕향안>에 수록된 노성(盧性) 인물 중 생몰 연대가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노성은 우암 송시열이 쓴 <회덕향안>의 서문에 나오는 회덕의 저명한 성씨(13姓) 중의 하나이고, <임자본 향안>에는 노姓의 향원 10인이 등록되어져 있다.
노집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였고, 자라면서 언행을 삼가고 무겁게 하였다. 그의 나이 38세가 되던 해인 1526년(중종21)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조회나 제사 등의 의식을 관장하는 통예원의 인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의령고 주부·선공감 주부 등을 거쳐, 지방 수령인 단성현감(종6품)이 되었다. 그가 단성현감이 되었을 때, 마침 영남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으나, 그는 백성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하였으므로 온 지방이 다 그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성의 관청이 실화됨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곧바로 복직되어 조지서사지가 되었으나,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회덕으로 낙향하였다.
노집이 고향에 돌아와서 어떤 삶을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나이 46세 때인 1534년(중종29) 3월에 자신이 지은 「구곡정기」에 잘 나타나 있다. 노집은 예에 대한 식견이 밝고 예의식이 투철하며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관료로 있을 때는 국가의 예의식을 주관하는 통예원에서 일한 바가 있었거니와, 관직을 떠나 낙향하여서도 정자를 짓되 단순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3년간 집상하던 곳에다가 정자를 지어 형제간의 화목을 더욱 굳게 하려는 데에 더 큰 뜻을 담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향에 돌아와 예행을 즐기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노집은 48세가 되던 해 10월, 갑자기 병을 얻어 서울로 올라가 치료했으나 고치지 못하고, 그해 12월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노집은 성품이 온유하여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나 안으로는 강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고, 벼슬에 있음에 청렴의 명성이 있었다. 일가에 화목하고, 벗에게 신의가 있으며, 밖과 속이 한결같았고, 일을 처리함에 자세하고 민첩하며, 고전에 널리 통하여 국가에서 큰일이 있으면 홍로(통예원의 별칭)에서 반드시 그를 추천하여 일을 주장하게 하였다. 노집의 인물됨은 16세기 회덕의 대표적 명사인 규암 송인수가 지은 묘갈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노집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벼슬은 그의 덕의 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고, 특히 예에 밝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집은 자연히 당대의 회덕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는 한말에 심석 송병순이 찬한 「낙헌공비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노집의 묘소는 현재 대전 유성구 문지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