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봉(文錫鳳)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5
문석봉(文錫鳳)
* 자(字) : 이필(而弼)
* 호(號) : 의산(義山)
* 년 대 : 1851년(철종2) - 1896(고종33)
* 관 직 : 오위장, 진잠현감, 양호소모사
* 활 동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묘 소 : 경북 현풍
문석봉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호는 의산(義山)이며, 본관은 남평이다. 그는 1815년 경북 현풍군 상동리에서 부친 문하규와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석봉의 집안은 영남의 한미한 선비 집안이었고,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평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솜씨가 있어서 12세 때 벌써 죽궁으로 소뿔을 맞히면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스무 살 때에는 암자에 들어가 3년간 무술을 익혔고, 이후 2년간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탐독하였으며, 25세 때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32세 때 전라도의 세곡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조운관이 되었으나, 세곡을 싣고 목포-무안 부근을 지날 때 이 지역민들의 극심한 기근을 보고서는 이것을 모두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정읍의 방장산으로 잠적해 버렸다. 그는 41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자제 50여 명에게 한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천군의 포군장이 되기도 하다가, 43세 때에야 별시 무과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를 시작하였다. 문석봉은 오위장, 진잠현감 등을 역임하고, 이어서 1894년에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때마침 창궐하던 동학당을 진압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진잠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895년 2월 문석봉은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던 중 공주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켜 의병을 일으켜서 토왜 하려고 한다는 고발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문석봉의 1차 의병봉기 계획은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1894년 갑오변란 이후 봉기한 갑오의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병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이듬해 을미사변 직후의 을미의병이며, 그 효시를 이루는 것이 곧 문석봉의 2차 의병봉기인 유성의병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거병하였다. 문석봉이 영남 출신으로서 유성에서 기병한 것은 의병의 모집이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성과 인접한 진잠현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이 일대에서 양호소모사로서 전투를 지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 인근의 사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선정비까지 세워진 바 있었고, 서울에서 의병운동에 찬동한 전 좌의정 송근수, 신응조 등이 이곳 회덕과 진잠의 사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주의병에 참여한 병사로는 유성·회덕·진잠·소전 등지에서 모집한 사민들로 구성되었고 의병진의 군량을 책임진 인물도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었다. 말하자면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회덕·진잠 일원의 향촌세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봉기한 항일의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석봉 의병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삼았다. 공주 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음력 10월 20일 그는 부대를 편성한 후 우선 회덕현을 급습하여 회덕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이로써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케 하여 유성 장대리에 진군하였다. 이어 진잠에 입성하고 일주일 후인 10월 28일에는 공암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이때 공주부에서는 전중군 백악원과 찰방 구완희가 각각 100명씩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운 것으로 보인다. 패산 후 문석봉은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지원을 약속한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그러나 문석봉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열렬하였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 봄, 최은동·오형덕과 함께 감옥을 파괴하고 탈출하여 식구들이 있는 과천집으로 갔으나 그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이미 불태워지고 없었다. 그는 그해 4월 원주로 가서 의병진의 도지휘가 되어 각 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곧 병에 걸려 8월 12일 고향 현풍으로 돌아갔으나 결국 11월 19일 46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말았다.
* 자(字) : 이필(而弼)
* 호(號) : 의산(義山)
* 년 대 : 1851년(철종2) - 1896(고종33)
* 관 직 : 오위장, 진잠현감, 양호소모사
* 활 동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묘 소 : 경북 현풍
문석봉은 한말의 의병장으로 호는 의산(義山)이며, 본관은 남평이다. 그는 1815년 경북 현풍군 상동리에서 부친 문하규와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석봉의 집안은 영남의 한미한 선비 집안이었고,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평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솜씨가 있어서 12세 때 벌써 죽궁으로 소뿔을 맞히면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스무 살 때에는 암자에 들어가 3년간 무술을 익혔고, 이후 2년간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탐독하였으며, 25세 때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침술을 비롯한 한의학을 3년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32세 때 전라도의 세곡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조운관이 되었으나, 세곡을 싣고 목포-무안 부근을 지날 때 이 지역민들의 극심한 기근을 보고서는 이것을 모두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정읍의 방장산으로 잠적해 버렸다. 그는 41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자제 50여 명에게 한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과천군의 포군장이 되기도 하다가, 43세 때에야 별시 무과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를 시작하였다. 문석봉은 오위장, 진잠현감 등을 역임하고, 이어서 1894년에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때마침 창궐하던 동학당을 진압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진잠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895년 2월 문석봉은 신영 영장으로 근무하던 중 공주 관병에게 신식훈련을 시켜 의병을 일으켜서 토왜 하려고 한다는 고발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문석봉의 1차 의병봉기 계획은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1894년 갑오변란 이후 봉기한 갑오의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병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이듬해 을미사변 직후의 을미의병이며, 그 효시를 이루는 것이 곧 문석봉의 2차 의병봉기인 유성의병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 장터에서 거병하였다. 문석봉이 영남 출신으로서 유성에서 기병한 것은 의병의 모집이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성과 인접한 진잠현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이 일대에서 양호소모사로서 전투를 지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 인근의 사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선정비까지 세워진 바 있었고, 서울에서 의병운동에 찬동한 전 좌의정 송근수, 신응조 등이 이곳 회덕과 진잠의 사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주의병에 참여한 병사로는 유성·회덕·진잠·소전 등지에서 모집한 사민들로 구성되었고 의병진의 군량을 책임진 인물도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었다. 말하자면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회덕·진잠 일원의 향촌세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봉기한 항일의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석봉 의병은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삼았다. 공주 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음력 10월 20일 그는 부대를 편성한 후 우선 회덕현을 급습하여 회덕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이로써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케 하여 유성 장대리에 진군하였다. 이어 진잠에 입성하고 일주일 후인 10월 28일에는 공암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이때 공주부에서는 전중군 백악원과 찰방 구완희가 각각 100명씩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싸운 것으로 보인다. 패산 후 문석봉은 경상도 고령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지원을 약속한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그러나 문석봉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열렬하였다.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 봄, 최은동·오형덕과 함께 감옥을 파괴하고 탈출하여 식구들이 있는 과천집으로 갔으나 그의 집은 일본병에 의해 이미 불태워지고 없었다. 그는 그해 4월 원주로 가서 의병진의 도지휘가 되어 각 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곧 병에 걸려 8월 12일 고향 현풍으로 돌아갔으나 결국 11월 19일 46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