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수(閔粹)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30
민 수(閔粹)
* 년 대 : 미상
* 관 직 : 예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 묘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민수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여흥민씨의 회덕 입향조인 민충원의 아들이다. 그는 1456년(세조2)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459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는 이어 지평 이영은 등과 함께 사가독서에 뽑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세조대에 사관직을 겸하였고, 1464년 천문·풍수·율여·의학·음양·사학·시학의 육성을 위하여 각 분야에 6인의 젊은 문신을 배치할 때 최경지 등과 함께 시학문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민수는 『세조실록』 편찬과 관련하여 소위 '민수의 사옥'을 일으킨 장본인이 됨으로써 죽을 고비를 겪게 된다. 그는 1469년(예종1) 봉상시 첨정 재직 중에 춘추관이 『세조실록』의 편찬을 시작하자 그간에 작성한 사초를 수납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사초에 실록편찬을 주관하고 있는 대신 등의 득실도 기재되었는데, 사초에 이를 기록한 사관의 이름을 명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춘추관 기사관인 강치선 등과 몰래 해당 사초를 꺼내어 지춘추관사 양성지에 관계된 내용 등을 고쳐 써서 납입하였다. 그러나 사초를 개사한 일이 발각되면서 그는 곧 의금부에 수감되어 사형으로 논죄되었으나, 예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서연관이었다는 인연과, 그가 독자라는 입장이 고려되어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관노의 신세가 되어 제주도로 보내졌다.
이후 1477년(성종8) 사면을 받은 민수는 서울로 돌아와 곧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예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민수는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가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
* 년 대 : 미상
* 관 직 : 예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 묘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민수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여흥민씨의 회덕 입향조인 민충원의 아들이다. 그는 1456년(세조2)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459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는 이어 지평 이영은 등과 함께 사가독서에 뽑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세조대에 사관직을 겸하였고, 1464년 천문·풍수·율여·의학·음양·사학·시학의 육성을 위하여 각 분야에 6인의 젊은 문신을 배치할 때 최경지 등과 함께 시학문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민수는 『세조실록』 편찬과 관련하여 소위 '민수의 사옥'을 일으킨 장본인이 됨으로써 죽을 고비를 겪게 된다. 그는 1469년(예종1) 봉상시 첨정 재직 중에 춘추관이 『세조실록』의 편찬을 시작하자 그간에 작성한 사초를 수납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사초에 실록편찬을 주관하고 있는 대신 등의 득실도 기재되었는데, 사초에 이를 기록한 사관의 이름을 명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로 인한 보복이 두려워 춘추관 기사관인 강치선 등과 몰래 해당 사초를 꺼내어 지춘추관사 양성지에 관계된 내용 등을 고쳐 써서 납입하였다. 그러나 사초를 개사한 일이 발각되면서 그는 곧 의금부에 수감되어 사형으로 논죄되었으나, 예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서연관이었다는 인연과, 그가 독자라는 입장이 고려되어 특별히 죽음을 면하고 관노의 신세가 되어 제주도로 보내졌다.
이후 1477년(성종8) 사면을 받은 민수는 서울로 돌아와 곧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예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민수는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가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