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민여검(閔汝儉)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38
민여검(閔汝儉)

 

() : 종례(宗禮)

() : 운촌(雲村), 운곡(雲谷)

년 대 : 1564(명종19) - 1627(인조5)

관 직 곽산군수울산군수

거 주 지 회덕 경운리(삼정동)

묘 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민여검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雲村(운촌), 본관은 여흥이다민여검은 군수 민사용의 7남으로 태어났는데, 7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 민여임을 따라 공부하여 1589(선조22)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한동안 회덕 선영의 동쪽 경운리에서 우거하며 호를 운촌 또는 운곡이라 했다여흥민씨 운촌공파의 시원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여검은 1608(선조41) 음보로서 남부참봉을 지내다가, 1613(광해군5)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그러나 당시의 권신 이이첨 등의 뜻에 거슬려 10여 년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뒤늦게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문원정자·박사·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나 권신 이이첨과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게 되자 그는 비로소 출사하여 곽산 군수가 되었다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그는 선봉장 박영서평안감사 이상길삭주부사 민인길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여 황주삭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나난이 평정된 후 도리어 지체했던 자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는 불운을 겪었다그러나 그는 곧 다시 울산부사로 복직되었고전공이 인정되어 인조 4년에는 가선대부(2)로 승품되었다그러나 이듬해 그는 호패법의 시행에서 명부 작성이 기한 내에 되지 못했다 하여 서울로 송환되었는데그가 가는 도중 정묘호란이 일어나 모든 요새가 연이어 함락되었음을 듣고울분 끝에 충청도 괴산에서 병사하였다성품이 깨끗하고 검소하여 옷이 허름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일생을 오직 충의와 애민으로 일관하였다 하며업무처리가 뛰어나고 성품과 행실이 깨끗하였으며충성심이 높고 치적이 우수하여 품복을 특사 받았다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