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민제인(閔齊仁)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65
민제인(閔齊仁)

 
() : 희중(希仲)

() : 입암(立巖)

년 대 : 1493(성종24) - 1549(명종4)

관 직 평안도관찰사대사헌형조참판호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우찬성좌찬성

저 서 입암집

묘 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이장 경기 양주)

 

 

민제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입암(立巖), 본관은 여흥이다동복 현감을 지낸 민구손의 아들이고 회덕 입향조인 민충원의 증손이다.

 

 

1520(중종15) 문과에 급제하여 湖堂(독서당)에 들어가 독서하였고이듬해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그러나 이때「척간유생도기」를 가필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이후 김안로가 물러나자 1525년 춘추관 기사관으로 다시 등용되었고사간원 정언을 거쳐 1531년 이조정랑에 올랐다이어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문신제술시에서 장원하였다.

 

 

이어 호조참의홍문관 부제학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는데이때 구언전지(求言傳旨)를 지어 올렸다. 1541년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고이어서 사헌부 대사헌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인종 때 사헌부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명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가 되었다그때 민제인은 당시의 권신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데 협조하였다그리하여 보익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에 봉해졌다이어서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547(명종2) 좌찬성에 올랐다이때 그는 진휼사를 겸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썼다.

 

 

1548(명종3) 윤원형 일당은 을사사화를 은폐하기 위하여 당시 「시정기」의 집필자인 안명세를 죽이고 그 기록을 고치려 하였다이때 민제인은 불가함을 강력하게 역설하여 간당들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고나아가서 대사간 진복창 등의 탄핵으로 녹훈이 삭제되고 마침내는 공주로 귀양 가게 되었다민제인은 적소에서 을사사화에 참여하여 많은 선비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고 지내다가 별세하였다.

 

 
문장과 역사에 능통하였으며저서로는 『입암집』이 있다부여 부소산의 고란사 옆 건물 내부에는 그가 지은 <백마강부>가 걸려있다우암 송시열이 지은 그의 신도비문에 의하면그의 묘소는 처음에 회덕 삼정동에 정해졌으나후에 경기도 양주군 명우리에 이장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