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사(宋國士)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68
송국사(宋國士)
* 호(號) : 계담(桂潭)
* 년 대 : 1612년(광해군4) - 1690년(숙종16)
* 관 직 : 사헌부 감찰 겸 전중어사, 고창현감
* 증 직 : 통훈대부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기주관
* 거 주 지 : 회덕 송촌
* 유 적 : 풍월정(대덕구 신일동), 평근당(전북 고창)
* 저 서 : 계담유고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송국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계담(桂潭), 본관은 은진이다. 군수 송남수의 손자이며 장령 송희진의 장자이다. 7세에 효경을 통독하였고, 9세에는 소학을 밝게 풀어내어 조부의 지극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으며, 15세에 이르러서는 6경을 독실하게 배웠다. 그는 일찍이 기상이 출중하고 도량이 활발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으며, 대의에 밝아 언행에 실수가 없었다. 장성해서는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송준길과 교유하였다.
1651년(효종3) 45세에 천거로 사산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직첩에 청국의 연호가 씌어 있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였고, 또 그 후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송시열·송준길이 관직에 나가기를 특별히 권하므로, 1666년(현종7)에 사포서 별제로 옮겼다가, 다시 사헌부 감찰 겸 전중어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그는 매사를 명백하고 바르게 잘 처리하였으므로 조정이 다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위법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종은 "송감찰이 어사가 된 후로는 온 조정이 하나도 명령을 위반하고 법을 범하는 자가 없으니 참 어사답구나" 라고 칭찬하면서 친히 그에게 사경을 내리시고 그가 다른 곳으로 전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하교를 내린 바도 있었다. 그리하여 송국사는 3년 동안이나 다른 관서로 전임되지 않았다.
그 후 58세가 되던 해(1668)에 이른 바 칠문사건(그는 남인으로서 횡포가 심했던 오시수·김덕원·목내서 등의 대문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들의 모함을 받아 이듬해 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1671년까지 2년 4개월 동안 고창현감에 재임하였는데 재임 중 정사를 잘 보살펴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의 치적은 송시열이 지은 고창현 평근당기에 잘 나타나 있다. 평근당은 그가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지 3개월 만인 1669년(현종10)에 동헌 옆에 세운 별당인데 그 후 훼손되어 없어졌던 것을 1988년 정부에서 이를 복원하고 <평근당>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후손들이 송시열이 지은 기문을 다시 새겨 달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인 1671년에 감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회덕의 계담(대덕구 신일동)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지냈다. 이곳에는 일찍이 그의 외증조 정복시(호는 계담)가 계담대를 세웠던 곳이었으나, 그것이 허물어진 후인데 송시열은 새로 지은 이 정자를 '풍월정' 이라 이름 하였다. 송국사는 여기에서 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음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송국사는 1675년(숙종1) 봄에 송시열이 귀양 가고, 송준길의 관작이 추탈되자, 그의 장자로 하여금 송시열을 호종케 하였고, 또한 1677년 여름에는 이들에게 더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송규렴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하였다. 1681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동춘의 관작이 회복되고 치제가 하사되었으며, 우암도 풀려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15)에는 우암이 세상을 뜨자 송국사는 망극함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 아들을 급히 정읍으로 보내어 우암의 상여 길을 호위하도록 한 바 있다. 그는 집안 행실이 지극히 갖추어져서 효성과 우애로서 이름이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 있어서도 뛰어났는데 그가 남긴 시문의 일부는 『계담유고』에 수록되어 현전하고 있다.
* 자(字) : 일경(一卿)
* 호(號) : 계담(桂潭)
* 년 대 : 1612년(광해군4) - 1690년(숙종16)
* 관 직 : 사헌부 감찰 겸 전중어사, 고창현감
* 증 직 : 통훈대부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기주관
* 거 주 지 : 회덕 송촌
* 유 적 : 풍월정(대덕구 신일동), 평근당(전북 고창)
* 저 서 : 계담유고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송국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계담(桂潭), 본관은 은진이다. 군수 송남수의 손자이며 장령 송희진의 장자이다. 7세에 효경을 통독하였고, 9세에는 소학을 밝게 풀어내어 조부의 지극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으며, 15세에 이르러서는 6경을 독실하게 배웠다. 그는 일찍이 기상이 출중하고 도량이 활발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으며, 대의에 밝아 언행에 실수가 없었다. 장성해서는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송준길과 교유하였다.
1651년(효종3) 45세에 천거로 사산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직첩에 청국의 연호가 씌어 있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였고, 또 그 후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송시열·송준길이 관직에 나가기를 특별히 권하므로, 1666년(현종7)에 사포서 별제로 옮겼다가, 다시 사헌부 감찰 겸 전중어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그는 매사를 명백하고 바르게 잘 처리하였으므로 조정이 다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위법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종은 "송감찰이 어사가 된 후로는 온 조정이 하나도 명령을 위반하고 법을 범하는 자가 없으니 참 어사답구나" 라고 칭찬하면서 친히 그에게 사경을 내리시고 그가 다른 곳으로 전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하교를 내린 바도 있었다. 그리하여 송국사는 3년 동안이나 다른 관서로 전임되지 않았다.
그 후 58세가 되던 해(1668)에 이른 바 칠문사건(그는 남인으로서 횡포가 심했던 오시수·김덕원·목내서 등의 대문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들의 모함을 받아 이듬해 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1671년까지 2년 4개월 동안 고창현감에 재임하였는데 재임 중 정사를 잘 보살펴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의 치적은 송시열이 지은 고창현 평근당기에 잘 나타나 있다. 평근당은 그가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지 3개월 만인 1669년(현종10)에 동헌 옆에 세운 별당인데 그 후 훼손되어 없어졌던 것을 1988년 정부에서 이를 복원하고 <평근당>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후손들이 송시열이 지은 기문을 다시 새겨 달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인 1671년에 감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회덕의 계담(대덕구 신일동)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지냈다. 이곳에는 일찍이 그의 외증조 정복시(호는 계담)가 계담대를 세웠던 곳이었으나, 그것이 허물어진 후인데 송시열은 새로 지은 이 정자를 '풍월정' 이라 이름 하였다. 송국사는 여기에서 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음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송국사는 1675년(숙종1) 봄에 송시열이 귀양 가고, 송준길의 관작이 추탈되자, 그의 장자로 하여금 송시열을 호종케 하였고, 또한 1677년 여름에는 이들에게 더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송규렴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하였다. 1681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동춘의 관작이 회복되고 치제가 하사되었으며, 우암도 풀려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15)에는 우암이 세상을 뜨자 송국사는 망극함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 아들을 급히 정읍으로 보내어 우암의 상여 길을 호위하도록 한 바 있다. 그는 집안 행실이 지극히 갖추어져서 효성과 우애로서 이름이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 있어서도 뛰어났는데 그가 남긴 시문의 일부는 『계담유고』에 수록되어 현전하고 있다.
송국사는 1690년(숙종16)에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동구 이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 13년에 통훈대부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기주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