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택(宋國澤)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70
송국택(宋國澤)
* 호(號) : 사우당(四友堂)
* 년 대 : 1597년(선조30) - 1659년(효종10)
* 관 직 : 광주목사, 성천부사, 형조참의, 공조참의, 예조참의, 전주부윤
* 출 생 지 : 회덕 송촌
* 저 서 : 사우당집
* 유 적 : 사우당(송촌에서 이사동으로 이전)
* 묘 소 : 공주 천내면 조교리
송국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사우당(四友堂), 본관은 은진이다. 송희명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재당숙인 진사 송몽인에게 양자 되었다. 동춘, 우암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9년(광해군1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정자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양호호소사인 김장생의 막료로서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정언·함길도 도사를 지내고, 지평이 되었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다가 수성도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문천 군수 등을 거쳐 다시 장령·종묘서령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국택은 척화를 주장하였고, 청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는 강화에서 원손을 안전하게 탈출시켰다. 이후 1639년(인조17)에는 병조참의로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해 가을에 광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송국택은 조선이 비록 청의 지배하에 있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화의의 구별을 엄정히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문(길흉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알리던 사육체의 글)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묘년의 의거 사실과 병자년의 척화사실, 그리고 원손 보호의 공적과 불서위호의 사실들은 모두『존주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송국택은 회덕 송촌으로 낙향하여 사우당을 짓고 학문을 벗하며 지냈다. 2년 뒤에 다시 성천부사가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주 부윤에 이르렀다.
63세에 졸하였고,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회덕의 정절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사우당집』이 있다. 처음에는 유성 남소홀리에 장사지냈으나, 14년 후에 공주 천내면 조교리로 이장하였다. 묘갈명은 송시열이 지었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 자(字) : 택지(澤之)
* 호(號) : 사우당(四友堂)
* 년 대 : 1597년(선조30) - 1659년(효종10)
* 관 직 : 광주목사, 성천부사, 형조참의, 공조참의, 예조참의, 전주부윤
* 출 생 지 : 회덕 송촌
* 저 서 : 사우당집
* 유 적 : 사우당(송촌에서 이사동으로 이전)
* 묘 소 : 공주 천내면 조교리
송국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사우당(四友堂), 본관은 은진이다. 송희명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재당숙인 진사 송몽인에게 양자 되었다. 동춘, 우암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9년(광해군1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정자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양호호소사인 김장생의 막료로서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정언·함길도 도사를 지내고, 지평이 되었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다가 수성도 찰방으로 좌천되었고, 문천 군수 등을 거쳐 다시 장령·종묘서령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국택은 척화를 주장하였고, 청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는 강화에서 원손을 안전하게 탈출시켰다. 이후 1639년(인조17)에는 병조참의로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해 가을에 광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송국택은 조선이 비록 청의 지배하에 있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화의의 구별을 엄정히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문(길흉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알리던 사육체의 글)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묘년의 의거 사실과 병자년의 척화사실, 그리고 원손 보호의 공적과 불서위호의 사실들은 모두『존주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송국택은 회덕 송촌으로 낙향하여 사우당을 짓고 학문을 벗하며 지냈다. 2년 뒤에 다시 성천부사가 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주 부윤에 이르렀다.
63세에 졸하였고,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회덕의 정절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사우당집』이 있다. 처음에는 유성 남소홀리에 장사지냈으나, 14년 후에 공주 천내면 조교리로 이장하였다. 묘갈명은 송시열이 지었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송국택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사위이고, 김우명의 2녀(송국택의 외손녀)가 후에 현종비인 명성왕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