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렴(宋奎濂)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2
송규렴(宋奎濂)
* 자(字) : 도원(道源)
* 호(號) : 제월당(霽月堂)
* 년 대 : 1630년(인조8) - 1709년(숙종35)
* 관 직 : 대사헌, 대사간, 좌참찬,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우참찬, 지돈령부사
* 증 직 : 좌찬성
* 출 생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유 적 : 제월당, 고택(읍내동), 취백정, 미호서원 유허(미호동)
* 저 서 : 제월당집
* 묘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외삼동
송규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제월당(霽月堂), 본관은 은진이다. 증 이조판서 송국전의 아들로 회덕 읍내에서 태어났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654년(효종5) 25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전적으로 승진하여 정언과 지평을 지냈으나, 편양(부모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맡음)을 위해 무장현감으로 나갔다. 그 후 병조정랑이 되었고, 용담현령, 삼사와 이조낭관에 제수되었다. 1669년(현종10) 사간원의 헌납(정5품)으로 있을 때 구민상소를 하여 부역을 덜고, 진휼을 베풀 것을 진언하여 왕의 가납을 받았다. 이후 응교(예문관 정4품)를 지내고, 서천군수가 되어서는 치적을 크게 올렸다.
1674년(현종15) 사간(종3품)이 되었는데, 남인계가 기해년의 예설이 잘못되었고 그 책임이 서인의 송시열·송준길 등에 있다고 상소함으로써, 송시열은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고, 이미 작고한 송준길 또한 관작을 추탈 당하게 되었다. 이에 송규렴은 사간으로서 그 부당함과 이들의 무죄를 상소하였으나, 이미 남인계가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만 파면되고 말았다. 그 후 1680년(숙종6) 이른 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그는 다시 기용되어 수찬·사성·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정3품)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시폐사조(時弊四條)를 진언하였다. 이어 안변부사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마침 수재가 심했으므로 그는 곡식을 내어 진휼하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백성들이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게 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사저에 제월당(대덕구 읍내동)을 짓고, 금강 연안(대청호 수로)의 미호에 취백정을 세워 오로지 학문의 연마와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 이후 1694년(숙종20)의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일변되자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좌참판 및 예조판서를 거쳐 자헌대부(정2품 하계)로 승진하였다. 1699년에 70세로 기사에 들어간 뒤, 지중추부사, 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80세 때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는데, 이해에 향리 회덕에서 타계하였고, 후에 좌찬성에 증직 되었다.
송규렴은 자신의 호를 제월당이라 하였다. 이는 별당 당호와 같은 이름이다. 농암 김창협은 당기에서 제월은 광풍제월의 쌍청 중의 하나를 따서 붙인 것이니, 이는 그의 선조인 쌍청당 송유의 맑은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이라 하였다. 세리에 빠지면 의지가 나누어지고 염욕에 떨어지면 시청이 어두워져서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되고 또한 이목이 가리어져서 사물을 깊이 살피지 못하게 되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제월의 맑은 기품을 항상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규렴은 문과에 급제한 후 효종·현종·숙종의 삼조를 섬기면서 시무에 관계되는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특히 어려움에 빠져있는 백성의 구휼과 후생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의 논설은 지적하여 전달하는 핵심이 분명했고 간곡했으며, 모두가 경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므로, 일찍이 송시열은 그의 문장에 탄복하여 "아무런 하자가 없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학문이 일찍 열리고 논설이 엄준하였으므로 선배인 시남 유계와 창주 김익희 등이 중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다. 글씨는 전서를 특히 잘 썼다.
송규렴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으로 전승된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는 율곡의 학문이 '체(體)를 밝혀서 용(用)에 적절한 학문' 이라고 생각하여 그 학문 체계를 가장 추중하였고, 사계가 예를 강론하여 공이 있으므로 그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송준길·송시열과 함께 이른바 3송으로 일컬어지는데, 1672년에 이들은 뜻을 모아서 향촌의 자치규약으로서 <회덕향약>을 지은 바 있다. 회덕 향약은 향안과 함께 편집되어 있는데 그 <향안서>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 향약서>는 송규렴이 지었는데『회덕향교지』에 전해지고 있다.
1717년(숙종43) 지방의 유림들이 그의 학문 도덕과 광풍제월 같은 금도를 존경하고 사모하여 신탄진 미호리에 미호서원을 세워 그를 독향해 왔으나 현재는 유허만 남아있다. 그가 만년까지 살면서 강학하던 곳인 제월당은 대덕구 읍내동에 현전하고 있으며, 유고로는 『제월당집』이 있다. 묘소와 신도비는 유성구 외삼동에 있다.
* 자(字) : 도원(道源)
* 호(號) : 제월당(霽月堂)
* 년 대 : 1630년(인조8) - 1709년(숙종35)
* 관 직 : 대사헌, 대사간, 좌참찬,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우참찬, 지돈령부사
* 증 직 : 좌찬성
* 출 생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유 적 : 제월당, 고택(읍내동), 취백정, 미호서원 유허(미호동)
* 저 서 : 제월당집
* 묘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외삼동
송규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제월당(霽月堂), 본관은 은진이다. 증 이조판서 송국전의 아들로 회덕 읍내에서 태어났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654년(효종5) 25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전적으로 승진하여 정언과 지평을 지냈으나, 편양(부모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맡음)을 위해 무장현감으로 나갔다. 그 후 병조정랑이 되었고, 용담현령, 삼사와 이조낭관에 제수되었다. 1669년(현종10) 사간원의 헌납(정5품)으로 있을 때 구민상소를 하여 부역을 덜고, 진휼을 베풀 것을 진언하여 왕의 가납을 받았다. 이후 응교(예문관 정4품)를 지내고, 서천군수가 되어서는 치적을 크게 올렸다.
1674년(현종15) 사간(종3품)이 되었는데, 남인계가 기해년의 예설이 잘못되었고 그 책임이 서인의 송시열·송준길 등에 있다고 상소함으로써, 송시열은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고, 이미 작고한 송준길 또한 관작을 추탈 당하게 되었다. 이에 송규렴은 사간으로서 그 부당함과 이들의 무죄를 상소하였으나, 이미 남인계가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만 파면되고 말았다. 그 후 1680년(숙종6) 이른 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그는 다시 기용되어 수찬·사성·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정3품)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시폐사조(時弊四條)를 진언하였다. 이어 안변부사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마침 수재가 심했으므로 그는 곡식을 내어 진휼하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백성들이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게 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사저에 제월당(대덕구 읍내동)을 짓고, 금강 연안(대청호 수로)의 미호에 취백정을 세워 오로지 학문의 연마와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 이후 1694년(숙종20)의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일변되자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 좌참판 및 예조판서를 거쳐 자헌대부(정2품 하계)로 승진하였다. 1699년에 70세로 기사에 들어간 뒤, 지중추부사, 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80세 때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는데, 이해에 향리 회덕에서 타계하였고, 후에 좌찬성에 증직 되었다.
송규렴은 자신의 호를 제월당이라 하였다. 이는 별당 당호와 같은 이름이다. 농암 김창협은 당기에서 제월은 광풍제월의 쌍청 중의 하나를 따서 붙인 것이니, 이는 그의 선조인 쌍청당 송유의 맑은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이라 하였다. 세리에 빠지면 의지가 나누어지고 염욕에 떨어지면 시청이 어두워져서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되고 또한 이목이 가리어져서 사물을 깊이 살피지 못하게 되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제월의 맑은 기품을 항상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규렴은 문과에 급제한 후 효종·현종·숙종의 삼조를 섬기면서 시무에 관계되는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특히 어려움에 빠져있는 백성의 구휼과 후생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의 논설은 지적하여 전달하는 핵심이 분명했고 간곡했으며, 모두가 경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므로, 일찍이 송시열은 그의 문장에 탄복하여 "아무런 하자가 없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학문이 일찍 열리고 논설이 엄준하였으므로 선배인 시남 유계와 창주 김익희 등이 중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다. 글씨는 전서를 특히 잘 썼다.
송규렴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으로 전승된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는 율곡의 학문이 '체(體)를 밝혀서 용(用)에 적절한 학문' 이라고 생각하여 그 학문 체계를 가장 추중하였고, 사계가 예를 강론하여 공이 있으므로 그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송준길·송시열과 함께 이른바 3송으로 일컬어지는데, 1672년에 이들은 뜻을 모아서 향촌의 자치규약으로서 <회덕향약>을 지은 바 있다. 회덕 향약은 향안과 함께 편집되어 있는데 그 <향안서>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 향약서>는 송규렴이 지었는데『회덕향교지』에 전해지고 있다.
1717년(숙종43) 지방의 유림들이 그의 학문 도덕과 광풍제월 같은 금도를 존경하고 사모하여 신탄진 미호리에 미호서원을 세워 그를 독향해 왔으나 현재는 유허만 남아있다. 그가 만년까지 살면서 강학하던 곳인 제월당은 대덕구 읍내동에 현전하고 있으며, 유고로는 『제월당집』이 있다. 묘소와 신도비는 유성구 외삼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