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남수(宋 壽)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61
송남수(宋 壽)
* 자(字) : 영로(靈老)
* 호(號) : 송담(松潭)
* 년 대 : 1537년(중종32) - 1626년(인조4)
* 관 직 : 호조정랑, 사헌부 감찰, 통천군수, 임천군수
* 출 생 지 : 회덕 송촌
* 저 서 : 해동산천록, 송담집, 상예요람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하사
송남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송담(松潭), 본관은 은진이다. 안악군수 송세훈의 아들로 회덕 송촌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6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여묘의 도리를 다하였다. 1578년(선조11) 사포서 별제를 제수 받아 처음으로 출사하였다. 그 후 의영고 직장·상의원 주부·사헌부 감찰·정산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선조26)에는 종부시 주부, 상의원 판관, 호조정랑을 거쳐 외직으로 통천군수를 제수 받고 4년 후에 사직하였는데, 군민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1597년(선조30)에는 임천군수로 제수되었는데, 정유재란 때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는 혐의로 논죄될 처지에 있었으나 대신들이 힘써 보호해 주었다.
이때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한양과 회덕 송촌을 오가며 시와 담론, 산천유람으로 유유자적하였다. 그리하여 정작·이호민·한호·최립 등 당대의 묵객 명유들과도 교류하였다. 이해에는 특히 임란 때 소실된 회덕의 숭현서원을 중건하고 그 유지기반을 조성하는데 힘썼다. 숭현서원은 기묘사화 때 영의정으로서 사림을 보호했던 정광필과 '기묘명현'으로 꼽히는 충암 김정, 그리고 김안로와 윤원형 등의 역대 권신들의 세력과 싸우다가 희생된 규암 송인수 등을 향사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인데, 이후 김장생·송시영·이시직·송시열·송준길 등이 추향되었다.
또한 1599년(선조32)에는 가문의 족보를 만들었으나 소실되었다. 1606년 (선조39)에 나이 70세가 되어 품계가 통정대부로 오르고 부호군이 되었다. 80세 나이라 하여 또 가선대부가 되었고, 90세에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고 자신의 묘지를 스스로 지었으며, 이해 겨울 정침에서 별세했다. 묘소는 이사동에 있다.
송남수는 조용 단정하며 자상하고 화락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평생 재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몸을 닦아 아름답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향당 사람들은 그의 효도와 우애를 칭송하였고, 친구들은 청렴하고 소탈한 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산수와 경치를 찾아 유람하고, 시부를 짓거나 주식을 마련하여 벗들을 청하여 함께 즐겼다. 그리하여 한때의 명공 운사들과 시문의 교제가 끊이지 않아 그의 풍류는 세간에 잘 알려졌다. 벼슬을 떠나서는 별장·누정·사우를 수리하거나 새로 마련하여 명사들의 글로 편액을 만들어 걸고 선조를 모시고 자손을 가르치는 터전으로 삼았다. 족보에 그가 '쌍청당을 중수했다'라고 적힌 기사도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마 1590년의 쌍청당의 3차 중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송남수는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포기한 채 옛사람의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소학을 읽지 않으면 사람 노릇 할 수 없다.' 라면서 즐겨 읽었다. 만년에 『검신요결』이라는 수신서를 만들어 자제들에게 주었는데, 이는 여러 현인들의 글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동하고 공경하게 된 것을 발췌·기록한 것들이다. 저술에는 시문집 외에도 유람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해동산천록』과 예서 『상예요람』이 있고, 문집으로 『송담집』이 있다.
* 자(字) : 영로(靈老)
* 호(號) : 송담(松潭)
* 년 대 : 1537년(중종32) - 1626년(인조4)
* 관 직 : 호조정랑, 사헌부 감찰, 통천군수, 임천군수
* 출 생 지 : 회덕 송촌
* 저 서 : 해동산천록, 송담집, 상예요람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하사
송남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송담(松潭), 본관은 은진이다. 안악군수 송세훈의 아들로 회덕 송촌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6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여묘의 도리를 다하였다. 1578년(선조11) 사포서 별제를 제수 받아 처음으로 출사하였다. 그 후 의영고 직장·상의원 주부·사헌부 감찰·정산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선조26)에는 종부시 주부, 상의원 판관, 호조정랑을 거쳐 외직으로 통천군수를 제수 받고 4년 후에 사직하였는데, 군민이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1597년(선조30)에는 임천군수로 제수되었는데, 정유재란 때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는 혐의로 논죄될 처지에 있었으나 대신들이 힘써 보호해 주었다.
이때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한양과 회덕 송촌을 오가며 시와 담론, 산천유람으로 유유자적하였다. 그리하여 정작·이호민·한호·최립 등 당대의 묵객 명유들과도 교류하였다. 이해에는 특히 임란 때 소실된 회덕의 숭현서원을 중건하고 그 유지기반을 조성하는데 힘썼다. 숭현서원은 기묘사화 때 영의정으로서 사림을 보호했던 정광필과 '기묘명현'으로 꼽히는 충암 김정, 그리고 김안로와 윤원형 등의 역대 권신들의 세력과 싸우다가 희생된 규암 송인수 등을 향사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인데, 이후 김장생·송시영·이시직·송시열·송준길 등이 추향되었다.
또한 1599년(선조32)에는 가문의 족보를 만들었으나 소실되었다. 1606년 (선조39)에 나이 70세가 되어 품계가 통정대부로 오르고 부호군이 되었다. 80세 나이라 하여 또 가선대부가 되었고, 90세에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고 자신의 묘지를 스스로 지었으며, 이해 겨울 정침에서 별세했다. 묘소는 이사동에 있다.
송남수는 조용 단정하며 자상하고 화락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평생 재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몸을 닦아 아름답게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향당 사람들은 그의 효도와 우애를 칭송하였고, 친구들은 청렴하고 소탈한 것을 기뻐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산수와 경치를 찾아 유람하고, 시부를 짓거나 주식을 마련하여 벗들을 청하여 함께 즐겼다. 그리하여 한때의 명공 운사들과 시문의 교제가 끊이지 않아 그의 풍류는 세간에 잘 알려졌다. 벼슬을 떠나서는 별장·누정·사우를 수리하거나 새로 마련하여 명사들의 글로 편액을 만들어 걸고 선조를 모시고 자손을 가르치는 터전으로 삼았다. 족보에 그가 '쌍청당을 중수했다'라고 적힌 기사도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마 1590년의 쌍청당의 3차 중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송남수는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포기한 채 옛사람의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특히 '소학을 읽지 않으면 사람 노릇 할 수 없다.' 라면서 즐겨 읽었다. 만년에 『검신요결』이라는 수신서를 만들어 자제들에게 주었는데, 이는 여러 현인들의 글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동하고 공경하게 된 것을 발췌·기록한 것들이다. 저술에는 시문집 외에도 유람에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해동산천록』과 예서 『상예요람』이 있고, 문집으로 『송담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