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송상민(宋尙敏)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56
효자 송상민(宋尙敏)
* 자(字) : 자신(自愼)
* 호(號) : 석곡(石谷)
* 년 대 : 1626년(인조4) - 1679(숙종5)
* 증 직 : 사헌부 집의
* 출 생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유 적 : 효자정려(동구 마산동)
* 저 서 : 석곡집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송상민은 조선 후기의 효자·학자로 호는 석곡(石谷), 본관은 은진이다. 부호군 송시흥의 아들이다. 송시열·송준길의 문인이며 정자(程子)를 스승으로 삼았다. 11살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며 슬퍼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다. 부친이 병환이 들었을 때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몸으로서 대신하기를 원했고, 상을 당하여는 슬퍼함이 지나쳐서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잠잘 때는 몸을 반듯이 시체처럼 하지 않는다(寢不尸)"는 말을 듣고서는 반듯하게 누운 적이 없었다.
1660년(현종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72년(현종13)에 동춘 송준길의 상을 당하여는 스승을 위하여 5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2년 후 윤휴와 허목 등이 예론을 가탁하여 2차 예송을 일으켰다. 이때 송시열은 위리안치를 당하고 송준길은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 후 1677년(숙종3)에 조정에서는 송시열을 처형하고자 하여 고묘론(告廟論)이 일어났다. 이에 송상민은 원통하고 박절함을 견디지 못하여 2년 뒤 예경에 근거를 두고 소장을 만들어 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의 상소는 배척을 당하였고, 결국은 영의정 허적의 탄핵을 받아 죽게 되었다.
이때 송상민은 공사(피고인의 진술)를 통해 말하기를 " 예론을 들지 않으면 원통함을 송사할 수 없고, 스승의 원통함을 설원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었으니 이때가 향년 54세였다. 이듬해 허적이 궁중의 기름을 먹인 천막을 임의로 반출한 사건이 발각되고, 허견·윤휴 등의 역모사건이 드러나자, 숙종은 남인들을 배척했던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게 되었다. 이때 민노봉과 김청성이 송상민의 억울함을 아뢰니, 왕은 그에게 공조좌랑을 추증하고 그의 자제를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1689년(숙종15)에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추증한 벼슬을 삭탈하도록 하였으나, 1694년에 신용제의 상소에 의하여 직함이 회복되었다. 1699년(숙종25)에는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으며, 1873년(고종10)에는 좌의정 송근수가 그때 일을 상소하여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묘소와 묘비는 동구 마산동에 있고, 근처에 효행으로 받은 효자 정문이 있으며, 스승을 높이는 정신이 사림에 추앙되어 정절서원(가양동)과 남간정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곡집』이 있다.
* 자(字) : 자신(自愼)
* 호(號) : 석곡(石谷)
* 년 대 : 1626년(인조4) - 1679(숙종5)
* 증 직 : 사헌부 집의
* 출 생 지 : 회덕 읍내(읍내동)
* 유 적 : 효자정려(동구 마산동)
* 저 서 : 석곡집
* 묘 소 :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송상민은 조선 후기의 효자·학자로 호는 석곡(石谷), 본관은 은진이다. 부호군 송시흥의 아들이다. 송시열·송준길의 문인이며 정자(程子)를 스승으로 삼았다. 11살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며 슬퍼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다. 부친이 병환이 들었을 때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몸으로서 대신하기를 원했고, 상을 당하여는 슬퍼함이 지나쳐서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잠잘 때는 몸을 반듯이 시체처럼 하지 않는다(寢不尸)"는 말을 듣고서는 반듯하게 누운 적이 없었다.
1660년(현종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72년(현종13)에 동춘 송준길의 상을 당하여는 스승을 위하여 5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2년 후 윤휴와 허목 등이 예론을 가탁하여 2차 예송을 일으켰다. 이때 송시열은 위리안치를 당하고 송준길은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 후 1677년(숙종3)에 조정에서는 송시열을 처형하고자 하여 고묘론(告廟論)이 일어났다. 이에 송상민은 원통하고 박절함을 견디지 못하여 2년 뒤 예경에 근거를 두고 소장을 만들어 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의 상소는 배척을 당하였고, 결국은 영의정 허적의 탄핵을 받아 죽게 되었다.
이때 송상민은 공사(피고인의 진술)를 통해 말하기를 " 예론을 들지 않으면 원통함을 송사할 수 없고, 스승의 원통함을 설원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혹독한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었으니 이때가 향년 54세였다. 이듬해 허적이 궁중의 기름을 먹인 천막을 임의로 반출한 사건이 발각되고, 허견·윤휴 등의 역모사건이 드러나자, 숙종은 남인들을 배척했던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게 되었다. 이때 민노봉과 김청성이 송상민의 억울함을 아뢰니, 왕은 그에게 공조좌랑을 추증하고 그의 자제를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1689년(숙종15)에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추증한 벼슬을 삭탈하도록 하였으나, 1694년에 신용제의 상소에 의하여 직함이 회복되었다. 1699년(숙종25)에는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으며, 1873년(고종10)에는 좌의정 송근수가 그때 일을 상소하여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묘소와 묘비는 동구 마산동에 있고, 근처에 효행으로 받은 효자 정문이 있으며, 스승을 높이는 정신이 사림에 추앙되어 정절서원(가양동)과 남간정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