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宋時烈)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54
송시열(宋時烈)
* 자(字) : 영보(英甫)
* 호(號) : 우암(尤菴)
* 년 대 : 1607년(선조40) - 1689년(숙종15)
* 관 직 : 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 거 주 지 : 회덕 송촌, 비래(송촌동, 비래동)
* 저 서 : 주자대전잡억 외 8건 / 문집 : 우암집, 송자대전
* 묘 소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우암(尤菴), 본관은 은진이다. 아버지 송갑조(사옹원 봉사)와 어머니 선산곽씨(봉사 곽자방의 여)사이에 3남으로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친척인 동춘 송준길의 집(회덕 송촌)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일찍부터 회덕과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26세 이후에는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 등지로 옮겨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회덕인이라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기묘록』등을 배우면서 주희·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19세에 한산이씨(도사 이덕사의 여)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 사계 김장생(연산 거주)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31년(인조9) 김장생이 졸하자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29세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약 1년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중단되었다. 이때 인조가 오랑캐에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송시열은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이후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효종)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일찍부터 북벌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즉위와 함께 척화파와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송시열 역시 진선·장령 등의 관직으로서 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시무책인 <기축봉사>를 올렸는데, 그중 특히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산림세력이 북벌을 기도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계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53년(효종4) 이후 목사집의·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예로써 치렀고, 상을 마친 1657년에 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대신<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658년(효종9) 7월 찬선을 제수 받았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약 8개월간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하에 북벌 계획을 주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이 급서하자 상황은 일변되었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김우명 계열과의 갈등과 현종에 대한 실망이 중첩되어 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현종은 융숭한 예우로서 중용하려 했지만, 우의정(1668년)과 좌의정(1673년)으로 조정에 잠시 나아갔을 뿐 주로 재야에 물러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자문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15)의 2차 예송에서는 상황이 일변하였다.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는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고, 다음 해에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고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가 되었으며, 또 봉조하에 올랐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김익훈(김장생의 손자)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서인계 소장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가 가세하여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을 원자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송시열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 후 갑술환국(1694년)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70여개소의 서원이 설립되었고 그중 사액서원만도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숙종42)의 丙申處分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그러나 더 연원적으로는 조광조를 숭앙하였고, 특히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자로 자부하며 주자의 교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철학사상은 조광조의 지치주의
* 자(字) : 영보(英甫)
* 호(號) : 우암(尤菴)
* 년 대 : 1607년(선조40) - 1689년(숙종15)
* 관 직 : 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 거 주 지 : 회덕 송촌, 비래(송촌동, 비래동)
* 저 서 : 주자대전잡억 외 8건 / 문집 : 우암집, 송자대전
* 묘 소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우암(尤菴), 본관은 은진이다. 아버지 송갑조(사옹원 봉사)와 어머니 선산곽씨(봉사 곽자방의 여)사이에 3남으로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친척인 동춘 송준길의 집(회덕 송촌)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일찍부터 회덕과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26세 이후에는 회덕의 송촌·비래동·소제 등지로 옮겨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회덕인이라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기묘록』등을 배우면서 주희·이이·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19세에 한산이씨(도사 이덕사의 여)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 사계 김장생(연산 거주)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31년(인조9) 김장생이 졸하자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29세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약 1년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중단되었다. 이때 인조가 오랑캐에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송시열은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이후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효종)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일찍부터 북벌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즉위와 함께 척화파와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송시열 역시 진선·장령 등의 관직으로서 출사하였다. 이때 그는 시무책인 <기축봉사>를 올렸는데, 그중 특히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산림세력이 북벌을 기도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계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53년(효종4) 이후 목사집의·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예로써 치렀고, 상을 마친 1657년에 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대신<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658년(효종9) 7월 찬선을 제수 받았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약 8개월간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하에 북벌 계획을 주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이 급서하자 상황은 일변되었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김우명 계열과의 갈등과 현종에 대한 실망이 중첩되어 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현종은 융숭한 예우로서 중용하려 했지만, 우의정(1668년)과 좌의정(1673년)으로 조정에 잠시 나아갔을 뿐 주로 재야에 물러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자문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15)의 2차 예송에서는 상황이 일변하였다.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하자, 그는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고, 다음 해에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고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가 되었으며, 또 봉조하에 올랐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김익훈(김장생의 손자)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서인계 소장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가 가세하여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후일 경종)을 원자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송시열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 후 갑술환국(1694년)으로 무죄가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70여개소의 서원이 설립되었고 그중 사액서원만도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숙종42)의 丙申處分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송시열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정조대에 노론의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다.
송시열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이다. 그러나 더 연원적으로는 조광조를 숭앙하였고, 특히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자로 자부하며 주자의 교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철학사상은 조광조의 지치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