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복(延福)
카테고리
대덕의 인물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42
연 복(延福)
* 활동기간 : 1592(선조25) - 1598(선조31)
* 관 직 : 군자감, 판관, 훈련원
* 출 생 지 : 회덕 형호(대덕구 황호동 지역)
* 묘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연복은 조선 선조 때 회덕 출신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곡산이다. 곡산 연씨가 이곳 회덕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안동부사를 지낸 연정설(곡산부원군 연사종의 손자)이 세종 때부터 이곳 삼정동에 거주하게 되면서부터인데, 그의 후손들은 대개 삼정동과 충북 청원군 지역에 거주하여 왔다.
연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는 관직)의 판관(종5품)에 올라 있었는데, 이때(선조25년, 1592) 조선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형 연희와 그의 아들 연호겸 및 나완·변용 등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향리에서 4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때 그의 형 연희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의 첨정(종4품)에 올라 있었고, 그의 아들인 연호겸은 통덕랑이었으며, 나원과 변용은 하급 지휘관으로서 부장을 맡고 있었다. 연희·연복·연호겸과 나원·변용 등은 모두 <회덕향안>의 향원으로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로서, 당시 회덕의 지배 사족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복은 이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충북 청주 문의벌전 등의 숲속에서 왜적과 격투하여 적병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회인으로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마침 왜병 1백여 명이 마을로 들어와 방화하고 노략질하자, 기습하여 10여 명을 살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형 연희 및 아들 연호겸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
* 활동기간 : 1592(선조25) - 1598(선조31)
* 관 직 : 군자감, 판관, 훈련원
* 출 생 지 : 회덕 형호(대덕구 황호동 지역)
* 묘 소 :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연복은 조선 선조 때 회덕 출신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곡산이다. 곡산 연씨가 이곳 회덕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안동부사를 지낸 연정설(곡산부원군 연사종의 손자)이 세종 때부터 이곳 삼정동에 거주하게 되면서부터인데, 그의 후손들은 대개 삼정동과 충북 청원군 지역에 거주하여 왔다.
연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는 관직)의 판관(종5품)에 올라 있었는데, 이때(선조25년, 1592) 조선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형 연희와 그의 아들 연호겸 및 나완·변용 등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향리에서 4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때 그의 형 연희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의 첨정(종4품)에 올라 있었고, 그의 아들인 연호겸은 통덕랑이었으며, 나원과 변용은 하급 지휘관으로서 부장을 맡고 있었다. 연희·연복·연호겸과 나원·변용 등은 모두 <회덕향안>의 향원으로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로서, 당시 회덕의 지배 사족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복은 이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충북 청주 문의벌전 등의 숲속에서 왜적과 격투하여 적병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회인으로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마침 왜병 1백여 명이 마을로 들어와 방화하고 노략질하자, 기습하여 10여 명을 살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형 연희 및 아들 연호겸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