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대덕
16세기말 조선은 계속된 사화(士禍)와 당쟁으로 정치력이 많이 쇠잔해 있었고, 병농일치의 개병제는 사실상 무질서한 방군수포제로 전환되어 국방력은 극도로 허약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592년(선조 25)에 왜구의 15만8천7백 명이나 되는 대 군단의 침입을 받아 불과 20여일 만에 도성을 적에게 함락을 당하고, 선조 임금이 북으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때 구국을 위해 일어난 것이 의병이었다. 의병운동은 4월 24일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5월 3일에는 회덕과 인접한 옥천에서도 조헌의 의병봉기가 있게 되었다. 조헌은 처음에는 공주·청주간을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마침내 옥천에서 거병하였다. 조헌이 이끌었던 의병은 차령에서 적에게 포위되었지만 격퇴하였고, 이어서 조헌은 회덕·온양·정산상·홍주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영규의 승병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후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필사의 각오로 싸웠으나 조헌·영규 등을 포함한 700명 모두가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철수한 후에 박정량과 김승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 7백구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금산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임난 때에 회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즉 태종조 좌명공신 부원군 연사종의 5세손이고, 남대 장령 연정설의 손자이었던 연복이 의병을 일으켰다. 참정을 지냈던 연복은 임난이 일어나자 그의 형인 전봉사 연희와 부장 나수, 수문장 변세호, 출신 변용 등과 함께 의로운 군사 40여인을 이끌고 문의벌 전림에 잠복해 있다가 왜적 30여명을 만나 수명을 참수하고 사살하였다. 또 회인 휴류암 밑에 매복해 있다가, 왜적 100여명이 마을을 분탕질하기 직전에 나아가 적을 잡고 8명을 참수하고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이들의 공로로 당시 형강 일대의 군·읍이 안전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는 회덕 출신의 정치·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활약한 시기이다. 당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송준길·김경여 등으로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스승 김장생이 중용되고 김집 등이 관직에 나감에 따라 함께 출사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대하여 굴욕적인 굴복을 하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산림계이었던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이 대거 등장하여 효종과 더불어 북벌 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들의 북벌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는 회덕 출신의 노론계 산림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계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회덕현의 면별 호구 상황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회덕현 공주진관] '방리'조 의하면 다음과 같다.
에서와 같이 7개 면 128개 리에 2,491호이었고 인구수는 10,330명(남 5,207, 여 5,123)이다. 이는 {여지도서}에 비하여 약간 명의 주민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많았었는데 {호구총수}에서는 오히려 남자가 약간 명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호구총수}는 회덕의 옛 지명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있고, 실제로 이 지명이 지금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의 대덕구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근북면·일도면·현내면 등인데 원호는 1,199호에 4,947명이었고, 남자는 2,485명이고, 여자는 2,462명이다. 임란 직후 토지는 54만 결에 불과하여 국가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농지개간을 장려하고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3년간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양전 사업을 통해 양안(量案)에서 빠진 은결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정조 때에는 145만 결로 늘었다. 그럼에도 실제 토지의 파악은 원장부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회덕의 경우에도 같다. 즉 이 시기의 {여지도서}의 「회덕 조」에
라 하여 실제 원장부상에 있는 토지의 결수에 비하여 기묘(1759)시 실제로 파악된 토지는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서 당시에는 산촌의 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호서 대동법에서는 군·현을 산군(山郡)과 해읍(海邑)으로 구분하여 해읍은 미(米)로 산군은 목면(木棉)으로 징수토록 하였는데 회덕은 산군에 해당하여 목면으로 징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국가의 재정위기는 전세의 조정만으로는 개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공납과 균역세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을 경기도에서부터 처음 시행하여 상공(常貢)은 폐지하고, 그 대신 대동미(大同米)로 결당 미(米) 12두(斗)를 거두고, 산간지방에서는 포나 전(錢)으로도 납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은 징수된 대동미를 공인에게 공가로 지불하여 납입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공업과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취기준을 재부의 원천인 토지에 둠으로써 국가는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되었고, 하층 농민을 보호하는 이 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 수요를 위한 진상이나 별공(別貢)은 여전히 남아 그 폐단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켜 양인의 유망을 가져와 농촌의 황폐화를 초래한 것이 군포이었다. 따라서 양인에게 받던 군포를 1필로 감하여 주고 그 부족 분을 위하여 토지 1결당 결작(結作)으로 미(米) 2두씩 거두고 어세·염세·선박세 등을 균역청에서 징수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개편에 따른 회덕의 구체적인 부담을 {여지도서}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 임란이후 인구의 유리와 경지의 황폐화에 대처하여 개간지의 면세 등 법적 조처를 통해서 인구를 환집시키고, 경지를 복구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평지와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된 것은 17·8세기 이르러 집약농업기술의 발달과 수전 농업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전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저수지와 제언들이 축제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수전 농업의 발달로 수리시설의 정비 및 확대가 진행되면서 18세기말에 이르면 전국에 저수지가 약 6,000개에 달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회덕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회덕 지역에서도 활발히 하천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제언이 구축되었다. 특히 현재의 대덕구가 있던 지역에는 대전천과 갑천이 흐르고 있어 제언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회덕에 있었던 제언은 {증보문헌비고} 권146, [제언]조에서는 17개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언의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제언 조에는 17개 제언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명칭과 크기를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회덕 지역에는 17개의 제언이 축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 이르러 회덕 지역에서도 집약농업 기술의 발달과 수전의 활성화에 따라 평전의 개간이 활발하여 많은 축제(築堤)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덕에서 차출된 군병을 {여지도서}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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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 구국을 위해 일어난 것이 의병이었다. 의병운동은 4월 24일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5월 3일에는 회덕과 인접한 옥천에서도 조헌의 의병봉기가 있게 되었다. 조헌은 처음에는 공주·청주간을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마침내 옥천에서 거병하였다. 조헌이 이끌었던 의병은 차령에서 적에게 포위되었지만 격퇴하였고, 이어서 조헌은 회덕·온양·정산상·홍주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영규의 승병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후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필사의 각오로 싸웠으나 조헌·영규 등을 포함한 700명 모두가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철수한 후에 박정량과 김승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 7백구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금산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임난 때에 회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즉 태종조 좌명공신 부원군 연사종의 5세손이고, 남대 장령 연정설의 손자이었던 연복이 의병을 일으켰다. 참정을 지냈던 연복은 임난이 일어나자 그의 형인 전봉사 연희와 부장 나수, 수문장 변세호, 출신 변용 등과 함께 의로운 군사 40여인을 이끌고 문의벌 전림에 잠복해 있다가 왜적 30여명을 만나 수명을 참수하고 사살하였다. 또 회인 휴류암 밑에 매복해 있다가, 왜적 100여명이 마을을 분탕질하기 직전에 나아가 적을 잡고 8명을 참수하고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이들의 공로로 당시 형강 일대의 군·읍이 안전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는 회덕 출신의 정치·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활약한 시기이다. 당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송준길·김경여 등으로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스승 김장생이 중용되고 김집 등이 관직에 나감에 따라 함께 출사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대하여 굴욕적인 굴복을 하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산림계이었던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이 대거 등장하여 효종과 더불어 북벌 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들의 북벌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는 회덕 출신의 노론계 산림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계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회덕현의 면별 호구 상황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회덕현 공주진관] '방리'조 의하면 다음과 같다.
행 정 구 역 |
편호 |
남 |
여 |
인구계 |
1914년 행정구역 |
현 행정구역 |
|
현내면 |
비래동리 |
250 |
513 |
492 |
1,005 |
내남면 비래리 |
대덕구 비래동 |
연축동리 |
140 |
309 |
306 |
615 |
내남면연축동리 |
대덕구 연축동 |
|
동면 |
추 동 리 |
59 |
109 |
111 |
220 |
동면 추동리 |
동구 추 동 |
주 산 동 |
75 |
169 |
125 |
294 |
동면 주산리 |
동구 주산동 |
|
비룡동리 |
30 |
44 |
40 |
84 |
동면 비룡리 |
동구 비룡동 |
|
내남면 |
상송촌동 |
102 |
438 |
445 |
883 |
내남면 송촌리·비래리 |
대덕구 송촌동·비래리 |
하송촌동 |
65 |
151 |
172 |
323 |
내남면 중리 ·용전리 |
대덕구 중리동·용전동 |
|
오 정 동 |
130 |
263 |
363 |
626 |
내남면 오정리·중리 |
대덕구 오정동·중리동 |
|
연 효 리 |
73 |
167 |
202 |
369 |
외남면 연효리 |
동구 성남동 |
|
외남면 |
주 동 리 |
144 |
402 |
391 |
793 |
동면 주촌리 |
동구 주촌동 |
초 동 리 |
94 |
228 |
211 |
439 |
외남면 용방리 |
동구 용운동 |
|
흥 농 리 |
134 |
331 |
321 |
652 |
외남면 가양리 |
동구 흑농동 |
|
서면 |
갑 천 리 |
60 |
112 |
152 |
264 |
유등천면 삼천리 |
서구 삼천동 |
정 민 리 |
113 |
169 |
162 |
331 |
구즉면 전민리 |
유성구 전민동 |
|
북면 |
목 포 리 |
160 |
312 |
336 |
648 |
북면 목상리 |
대덕구 목상동 |
자운동리 |
62 |
253 |
179 |
432 |
북면 석봉리 |
대덕구 석봉동 |
|
방 등 리 |
78 |
186 |
246 |
432 |
북면 상서리 |
대덕구 용호동 |
|
일도면 |
상산대리 |
120 |
201 |
202 |
403 |
대덕구 장동, 용호동 |
|
미 호 리 |
281 |
349 |
333 |
682 |
북면 미호리 |
대덕구 미호동 |
|
이 현 리 |
180 |
262 |
237 |
499 |
북면 이현리 |
대덕구 이현동 |
|
총 계 |
2,350 |
4,968 |
5,026 |
9,994 |
회 덕 |
元戶 2491, 口 10,330( 남 5,207 여 5,123) |
동 면 |
元戶 312, 口 791( 남 405, 여 386) |
상추동리, 하추동리, 아야매리, 양천리, 운교리, 관동리, 반암리, 사동리, 동산치리, 아감리, 세천리, 신대리, 옹고치리, 묘동리, 삼거리, 홍동리, 주산리, 비룡동리, 줄동리 19리. |
|
외남면 |
元戶 396, 口 1,971(남 991, 여 980) |
줄동리, 신사동리, 세곡리, 삼정리, 제전리, 오리동리, 가오대리, 도사리, 구덕리, 와지리, 대별리, 응전리, 명월리, 상신대리, 천동리, 모오리, 산소동리, 초동리, 용방리, 선암리, 초곤리, 신대리, 대아동리, 온언리, 가양리, 솔즉리, 흥용리, 매봉리 28리 |
|
내남면 |
元戶 397, 口 1,891(남 958, 여 933) |
대양리, 상리, 북리, 남리, 평리, 용전리, 중리, 송촌봉촌상오정리, 하오정내동리, 동산리, 신설리, 홍도동리, 연효리, 갑천리 14리 |
|
서 면 |
元戶 187, 口 730(남 368, 여 362) |
갑천리, 이수정상신대리, 서원리, 하대리, 방축리, 중리, 산소동리, 역촌리, 정촌리, 청류리, 왕동리 11리 |
|
근북면 |
元戶 273, 口 1,539(남 773, 여 766) |
계담리, 신대리, 목포리, 신촌리, 가작리, 석봉리, 이동리, 덕암리, 덕연리, 내동리, 대탄리, 자운동리, 평촌리, 다즉리, 방등리, 죽촌리, 학소동리, 서당리, 장인촌 19리 |
|
일도면 |
元戶 559, 口 1,675(남 840, 여 835) |
상대산리, 장동리, 하산대리, 용호리, 미호리, 삼지리, 형지원리, 내동리, 부수동리, 삼산리, 갈전리, 이현리, 직동리, 당산리, 서점리, 마산리, 달감리 17리 |
|
현내면 |
元戶 367, 口 1,733(남 872, 여 861) |
비래동리, 법천리, 후곡상리, 중리, 중북리, 중남리, 교동리, 금성동리, 당하리, 대치상리, 와지리, 대화리, 연축동리, 신대리, 와동리, 본동리, 평촌리, 탑립리 18리. |
에서와 같이 7개 면 128개 리에 2,491호이었고 인구수는 10,330명(남 5,207, 여 5,123)이다. 이는 {여지도서}에 비하여 약간 명의 주민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많았었는데 {호구총수}에서는 오히려 남자가 약간 명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호구총수}는 회덕의 옛 지명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있고, 실제로 이 지명이 지금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의 대덕구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근북면·일도면·현내면 등인데 원호는 1,199호에 4,947명이었고, 남자는 2,485명이고, 여자는 2,462명이다.
임란 직후 토지는 54만 결에 불과하여 국가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농지개간을 장려하고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3년간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양전 사업을 통해 양안(量案)에서 빠진 은결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정조 때에는 145만 결로 늘었다. 그럼에도 실제 토지의 파악은 원장부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회덕의 경우에도 같다. 즉 이 시기의 {여지도서}의 「회덕 조」에
한 전 |
원장부 2,375결 25부 5속내, 진잡이 1,497결 78부 3속, 기묘시기실 877결 47부 2속. |
수 전 |
원장부 1,218결 88부 5속내, 진잡이 594결 58부 7속, 기묘시기실 624결 29부 8속. |
라 하여 실제 원장부상에 있는 토지의 결수에 비하여 기묘(1759)시 실제로 파악된 토지는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서 당시에는 산촌의 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호서 대동법에서는 군·현을 산군(山郡)과 해읍(海邑)으로 구분하여 해읍은 미(米)로 산군은 목면(木棉)으로 징수토록 하였는데 회덕은 산군에 해당하여 목면으로 징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국가의 재정위기는 전세의 조정만으로는 개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공납과 균역세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을 경기도에서부터 처음 시행하여 상공(常貢)은 폐지하고, 그 대신 대동미(大同米)로 결당 미(米) 12두(斗)를 거두고, 산간지방에서는 포나 전(錢)으로도 납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은 징수된 대동미를 공인에게 공가로 지불하여 납입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공업과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취기준을 재부의 원천인 토지에 둠으로써 국가는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되었고, 하층 농민을 보호하는 이 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 수요를 위한 진상이나 별공(別貢)은 여전히 남아 그 폐단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켜 양인의 유망을 가져와 농촌의 황폐화를 초래한 것이 군포이었다. 따라서 양인에게 받던 군포를 1필로 감하여 주고 그 부족 분을 위하여 토지 1결당 결작(結作)으로 미(米) 2두씩 거두고 어세·염세·선박세 등을 균역청에서 징수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개편에 따른 회덕의 구체적인 부담을 {여지도서}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 공 |
약재진상 2월 모향4근. 3월 길경10양 건지황2양 모향4근 백급2양 전호1근 5양 백모근5양. 6월 행인5양전 모력자1양 금은화3양. 7월 청상자5전 백급 3양 태수1합. 10월 목과13개 모향4근 전호14양 목단피12양 진하진상 활치5수 |
전 세 |
기묘시기목28동14필29척 2월시봉 3월육로수납호조 |
대 동 |
기묘시기목 42동 25필 전포삼리 3월시봉 4월 육로수납혜청. 저치미 92석2두 |
균 세 |
기묘시기 결전 765양6전 태세목21필29척. 선무군관포 25필 9월시봉 10월수납 |
조선후기 임란이후 인구의 유리와 경지의 황폐화에 대처하여 개간지의 면세 등 법적 조처를 통해서 인구를 환집시키고, 경지를 복구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평지와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된 것은 17·8세기 이르러 집약농업기술의 발달과 수전 농업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전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저수지와 제언들이 축제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수전 농업의 발달로 수리시설의 정비 및 확대가 진행되면서 18세기말에 이르면 전국에 저수지가 약 6,000개에 달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회덕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회덕 지역에서도 활발히 하천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제언이 구축되었다. 특히 현재의 대덕구가 있던 지역에는 대전천과 갑천이 흐르고 있어 제언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회덕에 있었던 제언은 {증보문헌비고} 권146, [제언]조에서는 17개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언의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제언 조에는 17개 제언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명칭과 크기를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화병자제언 |
관문 남쪽 13리. 주위 1,006척, 동서 255척, 남북 210척. |
소제계자제언 |
관문 남쪽 10리. 주위 2,618척, 동서 822척, 남북 850척. |
조교맹자제언 |
관문 남쪽 7리. 주위 1,670척, 동서 379척, 남북 281척. |
용천사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876척, 동서 234척, 남북 207척. |
광사동어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334척, 동서 152척, 남북 115척. |
준구추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730척, 동서 280척, 남북 197척. |
묘동장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449척, 동서 130척, 남북 110척. |
대화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16척, 동서 180척, 남북 152척. |
장봉개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509척, 동서 118척, 남북 94척. |
호명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73척, 동서 211척, 남북 191척. |
정민감자제언 |
관문 서북쪽 9리, 주위 660척, 동서 201척, 남북 181척. |
방도지이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6척, 동서 280척, 남북 198척. |
외다랑당자제언 |
관문 북쪽 13리, 주위 365척, 동서 105척, 남북 94척. |
덕음암형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4척, 동서 204척, 남북 158척. |
내다랑종자제언 |
관문 북쪽 12리, 주위 566척, 동서 198척, 남북 150척. |
계담복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765척, 동서 254척, 남북 195척. |
흥농대자제언 |
관문 동남쪽 15리, 주위 824척, 동서 285척, 남북은 196척. |
이처럼 회덕 지역에는 17개의 제언이 축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 이르러 회덕 지역에서도 집약농업 기술의 발달과 수전의 활성화에 따라 평전의 개간이 활발하여 많은 축제(築堤)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덕에서 차출된 군병을 {여지도서}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때 구국을 위해 일어난 것이 의병이었다. 의병운동은 4월 24일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5월 3일에는 회덕과 인접한 옥천에서도 조헌의 의병봉기가 있게 되었다. 조헌은 처음에는 공주·청주간을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마침내 옥천에서 거병하였다. 조헌이 이끌었던 의병은 차령에서 적에게 포위되었지만 격퇴하였고, 이어서 조헌은 회덕·온양·정산상·홍주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영규의 승병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후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필사의 각오로 싸웠으나 조헌·영규 등을 포함한 700명 모두가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철수한 후에 박정량과 김승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 7백구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금산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임난 때에 회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즉 태종조 좌명공신 부원군 연사종의 5세손이고, 남대 장령 연정설의 손자이었던 연복이 의병을 일으켰다. 참정을 지냈던 연복은 임난이 일어나자 그의 형인 전봉사 연희와 부장 나수, 수문장 변세호, 출신 변용 등과 함께 의로운 군사 40여인을 이끌고 문의벌 전림에 잠복해 있다가 왜적 30여명을 만나 수명을 참수하고 사살하였다. 또 회인 휴류암 밑에 매복해 있다가, 왜적 100여명이 마을을 분탕질하기 직전에 나아가 적을 잡고 8명을 참수하고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이들의 공로로 당시 형강 일대의 군·읍이 안전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는 회덕 출신의 정치·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활약한 시기이다. 당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송준길·김경여 등으로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스승 김장생이 중용되고 김집 등이 관직에 나감에 따라 함께 출사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대하여 굴욕적인 굴복을 하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산림계이었던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이 대거 등장하여 효종과 더불어 북벌 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들의 북벌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는 회덕 출신의 노론계 산림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계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회덕현의 면별 호구 상황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회덕현 공주진관] '방리'조 의하면 다음과 같다.
행 정 구 역 |
편호 |
남 |
여 |
인구계 |
1914년 행정구역 |
현 행정구역 |
|
현내면 |
비래동리 |
250 |
513 |
492 |
1,005 |
내남면 비래리 |
대덕구 비래동 |
연축동리 |
140 |
309 |
306 |
615 |
내남면연축동리 |
대덕구 연축동 |
|
동면 |
추 동 리 |
59 |
109 |
111 |
220 |
동면 추동리 |
동구 추 동 |
주 산 동 |
75 |
169 |
125 |
294 |
동면 주산리 |
동구 주산동 |
|
비룡동리 |
30 |
44 |
40 |
84 |
동면 비룡리 |
동구 비룡동 |
|
내남면 |
상송촌동 |
102 |
438 |
445 |
883 |
내남면 송촌리·비래리 |
대덕구 송촌동·비래리 |
하송촌동 |
65 |
151 |
172 |
323 |
내남면 중리 ·용전리 |
대덕구 중리동·용전동 |
|
오 정 동 |
130 |
263 |
363 |
626 |
내남면 오정리·중리 |
대덕구 오정동·중리동 |
|
연 효 리 |
73 |
167 |
202 |
369 |
외남면 연효리 |
동구 성남동 |
|
외남면 |
주 동 리 |
144 |
402 |
391 |
793 |
동면 주촌리 |
동구 주촌동 |
초 동 리 |
94 |
228 |
211 |
439 |
외남면 용방리 |
동구 용운동 |
|
흥 농 리 |
134 |
331 |
321 |
652 |
외남면 가양리 |
동구 흑농동 |
|
서면 |
갑 천 리 |
60 |
112 |
152 |
264 |
유등천면 삼천리 |
서구 삼천동 |
정 민 리 |
113 |
169 |
162 |
331 |
구즉면 전민리 |
유성구 전민동 |
|
북면 |
목 포 리 |
160 |
312 |
336 |
648 |
북면 목상리 |
대덕구 목상동 |
자운동리 |
62 |
253 |
179 |
432 |
북면 석봉리 |
대덕구 석봉동 |
|
방 등 리 |
78 |
186 |
246 |
432 |
북면 상서리 |
대덕구 용호동 |
|
일도면 |
상산대리 |
120 |
201 |
202 |
403 |
대덕구 장동, 용호동 |
|
미 호 리 |
281 |
349 |
333 |
682 |
북면 미호리 |
대덕구 미호동 |
|
이 현 리 |
180 |
262 |
237 |
499 |
북면 이현리 |
대덕구 이현동 |
|
총 계 |
2,350 |
4,968 |
5,026 |
9,994 |
회 덕 |
元戶 2491, 口 10,330( 남 5,207 여 5,123) |
동 면 |
元戶 312, 口 791( 남 405, 여 386) |
상추동리, 하추동리, 아야매리, 양천리, 운교리, 관동리, 반암리, 사동리, 동산치리, 아감리, 세천리, 신대리, 옹고치리, 묘동리, 삼거리, 홍동리, 주산리, 비룡동리, 줄동리 19리. |
|
외남면 |
元戶 396, 口 1,971(남 991, 여 980) |
줄동리, 신사동리, 세곡리, 삼정리, 제전리, 오리동리, 가오대리, 도사리, 구덕리, 와지리, 대별리, 응전리, 명월리, 상신대리, 천동리, 모오리, 산소동리, 초동리, 용방리, 선암리, 초곤리, 신대리, 대아동리, 온언리, 가양리, 솔즉리, 흥용리, 매봉리 28리 |
|
내남면 |
元戶 397, 口 1,891(남 958, 여 933) |
대양리, 상리, 북리, 남리, 평리, 용전리, 중리, 송촌봉촌상오정리, 하오정내동리, 동산리, 신설리, 홍도동리, 연효리, 갑천리 14리 |
|
서 면 |
元戶 187, 口 730(남 368, 여 362) |
갑천리, 이수정상신대리, 서원리, 하대리, 방축리, 중리, 산소동리, 역촌리, 정촌리, 청류리, 왕동리 11리 |
|
근북면 |
元戶 273, 口 1,539(남 773, 여 766) |
계담리, 신대리, 목포리, 신촌리, 가작리, 석봉리, 이동리, 덕암리, 덕연리, 내동리, 대탄리, 자운동리, 평촌리, 다즉리, 방등리, 죽촌리, 학소동리, 서당리, 장인촌 19리 |
|
일도면 |
元戶 559, 口 1,675(남 840, 여 835) |
상대산리, 장동리, 하산대리, 용호리, 미호리, 삼지리, 형지원리, 내동리, 부수동리, 삼산리, 갈전리, 이현리, 직동리, 당산리, 서점리, 마산리, 달감리 17리 |
|
현내면 |
元戶 367, 口 1,733(남 872, 여 861) |
비래동리, 법천리, 후곡상리, 중리, 중북리, 중남리, 교동리, 금성동리, 당하리, 대치상리, 와지리, 대화리, 연축동리, 신대리, 와동리, 본동리, 평촌리, 탑립리 18리. |
에서와 같이 7개 면 128개 리에 2,491호이었고 인구수는 10,330명(남 5,207, 여 5,123)이다. 이는 {여지도서}에 비하여 약간 명의 주민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많았었는데 {호구총수}에서는 오히려 남자가 약간 명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호구총수}는 회덕의 옛 지명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있고, 실제로 이 지명이 지금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의 대덕구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근북면·일도면·현내면 등인데 원호는 1,199호에 4,947명이었고, 남자는 2,485명이고, 여자는 2,462명이다.
임란 직후 토지는 54만 결에 불과하여 국가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농지개간을 장려하고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3년간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양전 사업을 통해 양안(量案)에서 빠진 은결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정조 때에는 145만 결로 늘었다. 그럼에도 실제 토지의 파악은 원장부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회덕의 경우에도 같다. 즉 이 시기의 {여지도서}의 「회덕 조」에
한 전 |
원장부 2,375결 25부 5속내, 진잡이 1,497결 78부 3속, 기묘시기실 877결 47부 2속. |
수 전 |
원장부 1,218결 88부 5속내, 진잡이 594결 58부 7속, 기묘시기실 624결 29부 8속. |
라 하여 실제 원장부상에 있는 토지의 결수에 비하여 기묘(1759)시 실제로 파악된 토지는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서 당시에는 산촌의 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호서 대동법에서는 군·현을 산군(山郡)과 해읍(海邑)으로 구분하여 해읍은 미(米)로 산군은 목면(木棉)으로 징수토록 하였는데 회덕은 산군에 해당하여 목면으로 징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국가의 재정위기는 전세의 조정만으로는 개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공납과 균역세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을 경기도에서부터 처음 시행하여 상공(常貢)은 폐지하고, 그 대신 대동미(大同米)로 결당 미(米) 12두(斗)를 거두고, 산간지방에서는 포나 전(錢)으로도 납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은 징수된 대동미를 공인에게 공가로 지불하여 납입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공업과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취기준을 재부의 원천인 토지에 둠으로써 국가는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되었고, 하층 농민을 보호하는 이 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 수요를 위한 진상이나 별공(別貢)은 여전히 남아 그 폐단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켜 양인의 유망을 가져와 농촌의 황폐화를 초래한 것이 군포이었다. 따라서 양인에게 받던 군포를 1필로 감하여 주고 그 부족 분을 위하여 토지 1결당 결작(結作)으로 미(米) 2두씩 거두고 어세·염세·선박세 등을 균역청에서 징수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개편에 따른 회덕의 구체적인 부담을 {여지도서}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 공 |
약재진상 2월 모향4근. 3월 길경10양 건지황2양 모향4근 백급2양 전호1근 5양 백모근5양. 6월 행인5양전 모력자1양 금은화3양. 7월 청상자5전 백급 3양 태수1합. 10월 목과13개 모향4근 전호14양 목단피12양 진하진상 활치5수 |
전 세 |
기묘시기목28동14필29척 2월시봉 3월육로수납호조 |
대 동 |
기묘시기목 42동 25필 전포삼리 3월시봉 4월 육로수납혜청. 저치미 92석2두 |
균 세 |
기묘시기 결전 765양6전 태세목21필29척. 선무군관포 25필 9월시봉 10월수납 |
조선후기 임란이후 인구의 유리와 경지의 황폐화에 대처하여 개간지의 면세 등 법적 조처를 통해서 인구를 환집시키고, 경지를 복구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평지와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된 것은 17·8세기 이르러 집약농업기술의 발달과 수전 농업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전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저수지와 제언들이 축제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수전 농업의 발달로 수리시설의 정비 및 확대가 진행되면서 18세기말에 이르면 전국에 저수지가 약 6,000개에 달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회덕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회덕 지역에서도 활발히 하천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제언이 구축되었다. 특히 현재의 대덕구가 있던 지역에는 대전천과 갑천이 흐르고 있어 제언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회덕에 있었던 제언은 {증보문헌비고} 권146, [제언]조에서는 17개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언의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제언 조에는 17개 제언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명칭과 크기를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화병자제언 |
관문 남쪽 13리. 주위 1,006척, 동서 255척, 남북 210척. |
소제계자제언 |
관문 남쪽 10리. 주위 2,618척, 동서 822척, 남북 850척. |
조교맹자제언 |
관문 남쪽 7리. 주위 1,670척, 동서 379척, 남북 281척. |
용천사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876척, 동서 234척, 남북 207척. |
광사동어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334척, 동서 152척, 남북 115척. |
준구추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730척, 동서 280척, 남북 197척. |
묘동장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449척, 동서 130척, 남북 110척. |
대화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16척, 동서 180척, 남북 152척. |
장봉개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509척, 동서 118척, 남북 94척. |
호명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73척, 동서 211척, 남북 191척. |
정민감자제언 |
관문 서북쪽 9리, 주위 660척, 동서 201척, 남북 181척. |
방도지이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6척, 동서 280척, 남북 198척. |
외다랑당자제언 |
관문 북쪽 13리, 주위 365척, 동서 105척, 남북 94척. |
덕음암형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4척, 동서 204척, 남북 158척. |
내다랑종자제언 |
관문 북쪽 12리, 주위 566척, 동서 198척, 남북 150척. |
계담복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765척, 동서 254척, 남북 195척. |
흥농대자제언 |
관문 동남쪽 15리, 주위 824척, 동서 285척, 남북은 196척. |
이처럼 회덕 지역에는 17개의 제언이 축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 이르러 회덕 지역에서도 집약농업 기술의 발달과 수전의 활성화에 따라 평전의 개간이 활발하여 많은 축제(築堤)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덕에서 차출된 군병을 {여지도서}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공주진파총 1인, 초관 2인, 기패관 4인, 교사 1인, 마병 18명에 보 18명, 속오군잡색병 274명 |
○ 감영기패관 1인, 수첩별군관 6인, 아병 14명, 수미아병 15명, 재가군관화병 2명. |
○ 병영아병기패관 1인, 대맥군관 1인, 신선마병 1명 보 1명, 보군 16명, 납포 9명, 군뇌보 1명, 각색장인 1명, 봉수별장 1인, 감관 5인, 봉군 25명 보75명, |
○ 수영수군 20명, 보 14명. |
○ 훈련도감 포수 보 85명. |
○ 어영청 정군 25명, 자보 36명, 관납보 119명. |
○ 병조기병 171명, 보군 75명. |
○ 장악원 악공 보 1명. |
○ 기상품외안부 1,080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