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일제시대의대덕

카테고리
대덕의 역사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8
조회
61
1910년 한일합방이 강제로 이루어지자 많은 인사들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은 망명인사들에 의한 무력투쟁 및 외교적 독립운동과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고종의 장례일 앞두고 민심이 들끓어 손병희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대전·충남지역에서도 75회의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군중은 약 5만에 이르렀고, 충돌 횟수도 절반이 넘는 40회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에 의하여 파괴된 일제기관은 경찰관서 1, 헌병소 4, 군청 또는 면사무소, 기타 1개소로서 모두 10개소였다.

대전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3일 인동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되어 3월 16일 인동가마니장터에서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주동자는 산내면에 사는 양사길로 김노원·장운심·권학도 등과 함께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와 보병대의 사격으로 양사성 등 15명이 사망하였다. 같은 날 유성시장에서도 이상수·이권수 형제가 주도하여 300여명의 만세시위운동이 있었다. 대덕구 회덕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1일 회덕지역의 인사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밤 12시경에는 회덕역 앞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10년 일제는 회덕군청을 회덕읍에서 지금의 원동으로 강제로 이전시켰다. 1914년 3월에는 회덕군을 진잠군과 공주군 일부와 합쳐 대전군으로 바꾸어 회덕군은 역사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대전군은 회덕군과 진잠군 전부를 포함하였고, 공주군 현내면(유성) 57개 리·반포면의 4개 리·명탄면의 1개 리가 대전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의 두마면 2개 리, 식한면의 1개 리, 벌곡면의 1개 리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당시 대전군은 12개 면으로 대전·내남·외남·산내·유천·동면·북면·구즉·진잠·기성·탄동·유성 등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대전군에 포함된 대덕지역을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편이전의 면

소 속 리

북 면

문평리

회덕군 북면

문평리, 신흥리, 목중리, 구즉면 봉산리 각 일부.

목상리

신흥리, 목상리, 목중리, 목하리 각 일부

평촌리

귀암리, 하서당리, 덕운리, 평촌 각 일부

신대리

신대리, 계상리, 계하리, 학소리, 목상리, 목중리, 구즉면 봉암리, 봉산리 각 일부

상서리

죽림리, 입암리, 상서당리, 송암리, 방등리, 평촌, 덕암리 각 일부

덕암리

니동, 덕운리, 덕암리, 석봉리, 목하리, 구즉면 가작리 각 일부

석봉리

신촌, 내동, 자암리, 달송리, 석봉리, 덕운리 구즉면 가작리 각 일부

용호리

회덕군 일도면

하산리, 용호리, 장동리 각 일부

장동리

상산리, 장동리 일부

미호리

미호리, 동현리, 삼정하리 일부

삼정리

삼정상리, 삼정중리, 산촌, 용호리, 삼정하리, 갈전하리, 삼산리 각 일부

부수리

부수리, 삼산리, 형지원리 각 일부

갈전리

갈전상리, 부수리, 갈전하리, 직동 각 일부

이현리

심곡리, 이현리

황호리

황호리, 지명리, 서당리 형지원리 일부

내남면

비래리

회덕군 내남면

대양리, 신촌, 비래리 일부

송촌리

비래리, 송촌, 중리 각 일부

중 리

봉동, 중리, 오정리, 상오리, 법동 각 일부

법동리

법동 일부

오정리

내동, 노촌, 상오리, 오정리, 봉촌, 외남면 동산리 각 일부, 서면노촌

대화리

율사동, 대화리, 구만리, 법동 각 일부. 서면 구만리

읍내리

후곡리, 금성리, 교동리, 읍내리, 당하리

용전리

송촌일부, 외남면 용전리

연축리

회덕군 현내면

연축동 일부

신대리

신대리, 목동, 와동, 연축동 각 일부

와동리

평촌, 목동, 와동 각 일부

위의 표에서 대덕구의 행정구역명과 동리 명이 이 때에 확정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6년에는 대전면의 구역 확장에 따라 외남면의 일부를 대전에 편입시켰다. 1931년에는 읍제의 실시에 따라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되었다. 이후 1935년에는 대전읍을 대전부(大田府)로 승격시켜 15개 정(동)을 관할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대전부에서 분리하여 대덕군을 신설하면서 이곳에 편입시켰다. 즉 대전부와 대덕군을 분리하였는데 대덕이란 명칭은 대전의 '대(大)'와 회덕의 '덕(德)'을 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때 대덕군이 관할하던 면은 산내면·동면·회덕면·북면·구즉면·유성면·탄동명·진잠면·기성면 등 9개 면이었다. 1940년 1월 31일에는 대덕군 유천면의 문화리·산성리·오류리·태평리와 외남면의 가양리·자양리·용운리의 각 일부를 대전부에 편입하였다. 다시 1940년 11월 1일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덕군의 일부 지역을 대전부에 편입시키고 동명을 모두 일본식의 정(町)으로 고쳤다. 이때에 대덕군에서 대전부로 편입된 지역은 외남면의 판암리·용운리·자양리·가양리·성남리·홍도리 등 6개 리이고, 유천면의 용두리·태평리·유천리·산성리 등 4개 리와 산내면의 석교리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