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촌동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04:04:56
조회
43
평촌동(坪村洞)
◎ 평촌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평촌교 [다리] : 대청주유소에서 동쪽으로 경부선철로 건너에 있다. 과거에는 이 다리를 이용하여 회덕과 신탄진을 왕래하였으나, 현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사람만이 왕래하고 있다.
◎ 평촌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평촌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용호동, 남쪽은 상서동, 서쪽은 덕암동, 북쪽은 신탄진동과 석봉동과 인접해 있다. 마을이 넓은 들판에 있었으므로 평촌(坪村) 또는 벌말이라 하였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동쪽으로 계족산 줄기를 뒤로하고 서쪽으로는 넓은 평지로 되어있어 논과 밭이 많아서 주민들의 생활도 대부분 농업에 의지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개발되어 철도차량 정비창·연초제조창·담배인삼공사와 삼성전자 물류센터 등 대규모 공업시설과, 청자·태양마을 등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다. 개발이전에는 평촌동에는 평촌·서당골·양촌·무지니(청자) 등의 자연 촌락이 잘 발달되어 있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개발로 더이상 예전의 취락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공업시설이 들어오면서 이곳의 주민들도 타지에서 많이 이주하여와, 지금은 원주민의 수보다 타지에서 이주하여온 수가 많고, 오히려 원주민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평촌동도 대덕구의 대부분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옛 마을들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평촌동의 토지이용 실태
『'99통계연감』을 통해서 살펴보면 평촌동의 총면적 2,595,795㎡로 이 중에 전(田)이 148,201㎡로 6%, 답(畓)이 93,910㎡로 4%, 임야가 874,540㎡로 34%, 대지가 226,997㎡로 9%, 공장용지가 582,924㎡로 22%, 도로용지가 84,297㎡로 3% 등으로 되어있어 임야를 제외한 대부분이 토지가 공장·대지·철도용지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는 옛날에 서당골이었던 지역에 한국담배인삼공사와 신탄진 연초제조창이 들어서 있고, 벌말·양촌 같은 마을에는 철도차량 정비창이 입지하고 있다.
◎ 평촌동의 연혁
평촌동의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 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 개편 시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평촌동이 회덕현 근북면 평촌리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조선 중기에 이미 평촌리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 이래 482년간 실시해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의 부에 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평촌동은 회덕군 북면 평촌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의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의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이 편입되어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귀암리·하서당리·덕운리·평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평촌리라 하여 대전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되면서 대전읍은 폐지되고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평촌동은 대덕군 북면 평촌리가 되었다. 1973년에는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신탄진읍 평촌리가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확장에 따라 대덕군이 폐지되고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평촌동은 법정동으로 덕암동에 소속되어 있다.
◎ 평촌동의 유래 및 지명
○ 평촌마을(坪村, 벌말) : 새터에서 남서쪽에 있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즉 야트막한 산 밑에 펼쳐진 넓은 벌판에 조성된 마을이라 하여 평촌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 이 마을에는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서 있다. 평촌은 예전에는 큰 동네여서 약 30∼40호가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은진송씨가 10호·전주이씨 10호·보성오씨 10호 정도이었고 기타 성씨들도 약간 거주하였다.
○ 서당골마을(아래서당, 하서당) : 새터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으므로 이를 서당골이라 부른다. 또 상서동에도 서당이 있어서 그쪽 서당은 지형상 위쪽으로 상서당이라 하고, 이곳은 하서당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고사리밭골 부근으로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에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들어서 있다. 당시 서당골에서 서당을 운영한 분은 은진송씨 송한경이란 사람이었다.
○ 무지니 마을(청자마을, 귀암) : 무지니 마을은 서당골 마을 안에 있는 마을로 고사리밭골에서 동쪽, 새터에서 북동쪽, 태양마을에서 바로 동남쪽에 있는데 마을 뒷산에 거북바위가 있어 구암(귀암)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동네가 무진장하게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무진니라 불렀으나 근래에 담배인삼공사가 입지 한 이후부터 1970년대 생산하였던 담배이름을 따서 청자마을이라 하였다. 서당골과 무지니 마을에는 총 25호 정도가 세거하였는데 은진송씨가 7∼8호·백씨가 10호·연산서씨 6∼7호·전주이씨가 7∼8호 정도 거주하였다.
○ 양촌(梁村)마을 : 평촌에서 북동쪽, 새터에서 남쪽에 있다. 현재 철도차량 정비창의 위치이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양씨가 처음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므로, 이를 양촌이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주로 양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서 있다.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서기 전에는 양촌에 남원양씨 3호, 은진송씨 3호 정도 살았다.
◎ 평촌동의 세거성씨
○ 남원양씨(南原梁氏) : 시조 양경문은 고려 때 지영월군사라 되어 있으나 그 후대의 사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누대에 걸쳐 남원을 중심으로 토착한 사족인 관계로 본관을 남원이라 하였다. 평촌동에 누대에 걸쳐 세거한 남원양씨의 가문이 있었지만 그 호구는 몇 호 되지 않았고, 평촌동에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오면서 상서동의 새터 등지로 이주하였다. 현재 이곳에 후손이 살고 있지만 자세한 내력을 조사할 수 없었다.
○ 수원백씨(水原白氏) : 평촌동의 수원백씨는 진안군 동향면에서 평촌동으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사유는 은진송씨로 병조좌랑을 지낸 친구를 따라 입향하였다 한다. 입향 시기는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약 150년 전쯤이라 하였다. 따라서 호구 수는 몇 호 되지 않았다 한다. 입향조는 백연진이라 한다. 참고로 회덕향안에 등장하는 수원백씨는 평촌동의 수원백씨는 같은 친족이 아니며, 현재의 동구 자양동에 세거하였던 수원백씨이다. 자양동에 세거하였던 수원백씨는 자양동에 수백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곳에 상당량의 토지도 소유하였던 씨족이었다.
○ 전주이씨(全州李氏) : 회덕의 평촌과 상서동에 세거하였던 전주이씨는 전주이씨 임영대군파 5대손 독촌 공 세계들이다. 회덕의 입향조는 이견봉으로 회인현감으로 있다가 회덕에 세거하게 되었다. 회덕에 입향 시기는 이견봉의 생몰년이 1576년에 출생하여 1600년에 몰하여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회덕에 입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견봉의 묘가 회덕현 북면 능동이었는데, 능동이라는 지명은 이견봉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됨으로써 능동이라 하였다 한다. 회덕의 전주이씨는 대략 30여 호 되었다.
◎ 평촌동의 옛 지명
● 거북바위(귀암) [바위] : 무지니 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부른다.
● 고사리밭골 [골] : 서당 골에서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고사리가 매우 많아서 이를 고사리밭골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이 자리에 신탄진연초제조장이 들어서 있다.
● 다랭이(다랑이) [들] : 철도차량 정비창 뒤쪽에, 윗다랑이와 아랫다랑이 사이에 있다. 지형 상 다랑이가 많아서 이를 다랑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상서동이었으나 지금은 평촌동이다.
● 달수생이 [마을] : 새터마을에서 동쪽, 무지니와 성주골 사이에 있다.
● 무지니(청자마을, 귀암) [마을] : 고사리밭골에서 동쪽, 새터에서 북동쪽, 태양마을에서 바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거북바위가 있으므로 구암이라고 부른다. 또는 동네가 무진장하게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무진이라고 부른다. 무지니, 구암 등의 마을 이름은 옛날의 이름이고, 현재는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면서 그곳에서 생산되던 청자라는 담배 이름을 따서 청자마을이라고 한다.
● 평촌(坪村 벌말) [마을] : 새터에서 남서쪽에 있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즉 얕으만한 산 밑에 펼쳐진 넓은 벌판에 조성된 마을이라 하여 평촌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 이 마을에는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서 있다.
● 새터(신대 新垈) [마을] : 서당 골에서 남쪽, 담배인삼공사 사택에서 바로 동북쪽에 있다. 평촌에 살던 주민이 옮겨와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기에 이를 새터 또는 신대라고 부른다.
● 서낭당고개(장고개) [고개] : 상서당마을과 장동의 욧골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로 황새봉에서 동쪽에 있다.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다고 해서 이를 상서동에서는 서낭당고개라고 부른다. 또 장동의 욧골에서는 신탄장을 보러 가기 위해 이 고개를 이용하기 때문에 장고개라고 부른다.
● 서당골(아래서당, 하서당) [마을] : 새터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었기에 서당골이라 부른다. 또 상서동에도 서당이 있어서 그쪽 서당은 지형 상 위쪽에 있어 상서당이라 하고, 이곳은 하서당이라 한다. 고사리밭골 부근으로써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에 담배인삼공사가 들어서 있다.
● 승주골(성주골) [골] : 철도차량 정비창 뒤, 다랑이에서 북쪽에 있다는 골짜기이다.
● 아랫다랭이(아랫다랑이) [들] : 다랑이의 북쪽에 있다. 철도차량 정비창 뒤쪽에 있는 다랑이를 중심으로 하여, 지형 상 위쪽에 있는 다랑이를 윗다랑이라고 하고, 아래에 있는 다랑이를 아랫다랑이라고 부른다.
● 양촌(梁村) [마을] : 평촌에서 북동쪽, 새터에서 남쪽에 있다. 현재 철도차량 정비창 위치이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양씨가 처음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므로, 이를 양촌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서 있다.
● 장고개(황서방고개) [고개] : 다랭이와 장동 양먹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 태양마을 [마을] : 무지니 마을과 전매청아파트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산이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이 태양인 것은 신탄진 연초제조창이 들어선 후 그곳에서 생산되던 담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 평촌교 [다리] : 대청주유소에서 동쪽으로 경부선철로 건너에 있다. 과거에는 이 다리를 이용하여 회덕과 신탄진을 왕래하였으나, 현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사람만이 왕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