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전동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0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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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전동(葛田洞)
● 큰골 [골] : 진구렁이의 북서쪽에 있으며, 전터골의 남쪽, 삼바골의 북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폭이 넓고 크기 때문에 큰골이라 했다.
◎ 갈전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갈전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청호와 접해 있고 남쪽은 이현동, 서쪽은 용호동, 북쪽은 삼정동과 접해 있는 동(洞)이다. 신탄진에서 대청댐으로 향하는 강변도로를 따라 4㎞가량 올라가면 이곳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남쪽으로 5㎞쯤 되는 지점에 갈전동의 갈밭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갈밭은 연봉의 동남쪽, 대문앞들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윗갈밭과 아래갈밭을 합쳐서 갈전이라 한다. 옛날에 갈대밭이 많아서 갈밭 또는 갈전이라 하였는데, 갈전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갈대로(蘆)자를 써서 노전(蘆田)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서해안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이 해태를 만드는데 필요한 갈대를 사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갈전동에 칡밭이 지천으로 덮여있어 갈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마을의 뒷산인 연봉산 아래에서 금강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계단식으로 잘 발달된 넓은 농토에서 농사를 짓던 큰 마을이었고, 당시 주민들의 생업은 대부분이 농업이었다. 그러나 대청댐의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어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일부는 현재의 갈전동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대부분은 신탄진·대전 등지로 이주하였다.
현재의 갈전동은 동쪽으로 넓은 대청호를 접하고 있으며, 호반도로를 따라 신탄진에서 동구 판암동으로 넘어가는 길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갈전의 수몰지역 주민 약 20여 호가 이주해와 생활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행정구역상 갈전동에 속한다. 따라서 현재의 갈전동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갈전동 도로 아래쪽에 1가구가 있는데, 이 집은 수몰 전에는 가장 산 위쪽에 위치해 있어 수몰을 면하였으나 지금은 외톨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 갈전동의 토지지목별 현황
『'99통계연보』를 통해 살펴보면 총면적은 3,229,437㎡이고 이 가운데 전(田)이 171,872,㎡로 5.3%, 답(畓)이 52,923㎡ 1.6%, 임야가 2,017,536㎡로 62%, 대지가 5,679㎡로 0.17%, 기타 도로, 하천 등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갈전동은 대부분이 임야이고 극히 일부분만이 전·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또한 갈전동 전지역이 개발제한구역과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지역주민에게는 생활에 큰 불편을 끼치고 있지만, 갈전동이 대청 호반을 접한 전원적인 환경을 지닌 자연마을로 존재할 수 있게 한 것도 사실이다.
갈전동은 앞쪽으로는 대청호가, 그리고 뒤쪽은 연봉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봄과 가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인데, 특히 아침 햇살이 대청 호반을 비출 때면 뒷산 연봉이 배경이 되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뤄내는 그림 같은 풍경 속의 마을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지조건으로 인하여 갈전동은 전원휴양지로 변모되었고, 이에 따라 음식점들이 앞다투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주민들은 적은 농토로는 생계가 어려워, 대부분 인근 지역에 생활의 기반을 두고 출·퇴근하거나 음식점 등을 하고 있다.
◎ 갈전동의 연혁
갈전동의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 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 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 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갈전동이 회덕현 일도면 갈전리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조선 중기에 이미 갈전리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 이래 482년간 실시되었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써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갈전동은 회덕군 일도면 갈전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을 편입하여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갈전리는 갈전상리·갈전하리·부수리·직동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갈전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읍이 폐지되고,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때 갈전동은 대덕군 북면 갈전리가 되었다. 그 후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갈전리는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에는 대전직할시의 지역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갈전동은 신탄진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 갈전동의 유래 및 지명
갈밭마을은 갈전(葛田) 혹은 노전(蘆田)으로 불리기도 하며, 연봉의 동남쪽, 대문앞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윗갈밭과 아래갈밭이 합쳐진 마을이다. 옛날에 갈대밭이 많이 있어 갈밭이라 했고, 더 이전에는 갈대노(蘆)자를 써서 노전이라고도 하였다. 갈전동의 자연마을은 크게 윗갈밭과 아래갈밭 두 개의 마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윗갈밭 마을은 윗갈밭, 갈전상리, 상갈(上葛)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윗갈밭을 다시 세분하여 양지말과 음지말로 나누어 부르는데, 윗갈밭은 갈밭(갈전리)의 전체적인 위치로 볼 때 위쪽에 있어서 윗갈밭이라 하였다. 양지말은 윗갈밭(上葛)의 북쪽 양지쪽에 있는 마을을 말하고, 음지말은 윗갈밭의 남쪽 음지쪽에 있는 마을을 음지말이라 하였다. 즉 산에 가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마을이라서 음지말이라고 하였다.
마을의 호구 수는 아랫갈밭(대청댐 수몰이전의 행정구역상으로 갈전2구, 음지말)과 윗갈밭(갈전1구, 양지말)을 합하여 80여 호를 웃도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는데, 당시 갈전 1구에는 약 50호 정도, 갈전2구에는 약 30호 정도가 거주하였었다. 1980년 대청댐의 완공과 더불어 대부분의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되자, 수몰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타지역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갈전에 있는 18호만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살고 있다.
갈전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00∼500년 전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갈밭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씨족이 원주변씨인데, 원주변씨의 입향조는 변견이다. 변견이 정종 경진(1400년)에 한성에서 출생하여 회덕으로 왔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시기가 15세기 초라 생각된다. 그 후에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자 변계남의 손자 변귀의 사위로 개성김씨 김진국이 갈전에 입향하게 되었다. 개성김씨의 입향 전에 거주지는 옥천이었다고 한다. 또 원주변씨와 더불어 갈전동에 오래 거주하였던 성씨로는 제주고씨가 있다. 제주고씨의 입향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주고씨 24세이었던 고사성으로 보인다. 이는 갈전동에 연고를 두었던 고석근씨의 증언에 의하면 고석근씨의 9대조가 갈전동에 입향하였다고 하여 족보상으로 확인한 결과이다. 정확한 입향 사유는 알 수 없으나 입향조 고사성의 처가 족보상에 은진송씨였음을 미루어 짐작건대 처향을 따라 입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주고씨 다음으로 갈전에 입향한 성씨는 창녕성씨이다. 창녕성씨의 입향 전 거주지는 이 지역의 창녕성씨 집성촌이었던 대덕군 금곡이었다. 창녕성씨가 갈전에 입향하게 된 배경은 창녕성씨의 딸이 원주변씨에게 출가하여 처향을 따라 입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갈전동의 대청호 변에 "노은성공낙순휼황비"가 있어 창녕성씨의 거주 사실을 보여 준다. 그다음으로 입향한 성씨는 순흥안씨로, 입향 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에 거주하다 입향하였으며, 입향조는 안승범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20년 전후해서 풍천임씨·문화유씨·옥천전씨 등이 입향하여 거주하다가 대청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타지로 이주하였다.
◎ 갈전동의 세거성씨
○ 원주변씨(原州邊氏) : 원주변씨의 비조(鼻祖, 시조)는 변려로 황주(黃州)사람이었다. 변려는 고려 고종 때 순수한 충성심과 성실한 절개로 상장군에 임명되었고, 태천백에 봉해졌었다. 변려의 8대손은 변안열(?~1439)이었는데, 변안열은 고려말 홍건적을 쳐부수고 탐라를 정복하고 왜적을 격파한 명장이었다. 변안열은 공은 김취려와 같았으며, 그 절개는 우현보와 같으며, 그 슬픔을 당한 일이 최영과 같았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변안열은 원나라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혼인할 때에 병부상서로서 원나라에서 노국공주를 모시고 왔으며, 공민왕을 섬겨 원천부원군으로 봉해 주었고, 본관을 원주로 정해 주었다.
변 이(가정대부(從二品) 좌군 도총재공)는 변안열의 3남1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 태조에 의하여 출사하여 1411년(태종 11년)에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원종공신이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22(세종 4년)에 충청도 안무사에 임명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가 중군총제가 되었다. 하정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진하사인 권희달의 죄상을 아뢰지 않았다 하여 직첩을 회수 당하였고, 다음해 좌군총제로 전보되었다. 그 후 1439(세종 21년)에 세상을 마쳤는데 묘는 남양주 진건면 지사동에 있다.
변상복(?~1455)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는 송헌(松軒)이다. 원천부원군 안렬의 손자이며 세종 때 도총제를 지낸 변이의 아들이다. 변상복은 덕천옹주에 장가들어 정종의 부마로 원천위가 되었는데 강릉부사로 재직하던 중 관청에서 작고하였다. 그의 장례는 남양주 진건면 지사동에 예장되었으며, 부마로서 불천지위가 되었다. 이후 1858(철종 9)에 14대손 변상진이 한성에 봉안되어 있던, 변상복의 위패를 향리에서 봉안하기 위하여 천묘 상소를 올려, 같은 해 4월 18일 철종의 승인으로 회덕의 직동(동구 직동)에 옮겼다. 변상복의 불천지묘는 현재도 후손들이 잘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3월과 9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원주변씨의 회덕 입향조는 변견(1400년~1461년)이다. 변견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음직으로 사용(종9품)을 제수 받았었으나 별업이 있었던 회덕의 노고산(동구 직동)아래 세거하게 되었다. 그의 묘소가 삼정동에 있으며 표석도 있다. 그리고 원주변씨의 사당이 갈전동에서 삼정동으로 넘어가는 대청호 변에 위치하고 있다. 회덕에 세거하였던 삼산 등으로 확산되어 집성촌을 이루었다. 원주변씨들은 각기 사는 곳에 따라서 이를 삼산파라 부르고 있다.
변견의 묘와 관련하여 흥미 있는 것은 이웃한 삼정동의 여흥민씨와의 소송사건이다. 이와 관련하여 변견의 5대손 변선주가 1675년(숙종 원년)에 세운 '사용변공묘표'에 생각건대 이곳에 공의 묘소를 모신 연대가 그다지 멀지도 않건마는, 오십 보 밖에다가 민씨들의 정령이 되었고 요사이 와서는 또 공의 묘소 근처에 자기들이 사용코자 공의 묘는 고총(古塚)이라 하고, 도리어 자기들이 금양을 하니 이는 원통이 뼈에 사무칠 일이다. 그러므로 선주 내가 금년 정월에 임금님에게 혈서의 탄원서를 올렸든 바, 임금님께서는 충청감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조사 보고토록 하여 하교하시기를 변선주와 민광훈이 다투는 산은 당초에 입장한 것으로는 변가가 주인이요, 지금의 형세는 민가가 주인 노릇을 하는데, 두 집이 각각 금양 할 평수가 있으니 이제부터 서로 금양 내에 침범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 하시었으니 임금님의 한 말씀이 감격하기 짝이 없으며, 우리 신민은 다 같이 법을 지키어야할 뿐이었다. 라 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갈전동에 세거하였던 원주변씨도 회덕을 대표하는 사족으로 1672년 중수된 {회덕향안}에는 통정 변용.유학 변징.유학 변선주.유학 변의.유학 변찬.유학 변락.유학 변극.유학 변석 등이 입록 되어 있다.
◎ 갈전동의 옛 지명 및 유래
● 가능골 [골] : 연봉의 북쪽 상여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갈밭(갈전葛田, 노전) [마을] : 연봉(燕峰)의 동남쪽, 대문앞들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윗갈밭과 아래갈밭이 합쳐진 마을이다. 옛날에 갈대밭이 있었기에 갈밭·갈전이라 하였고 이전에는 갈대 노(蘆)자를 써서 노전이라 하였다. 옛날에 서해안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이 해태 만드는데 필요한 갈대를 사기 위해 이곳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 감투바위 [바위] : 상여 골에서 덕고개로 올라가는 길옆에, 찬샴과 덕고개 사이 날망 근처인데, 바위 모양이 옛날 대감들이 쓰던 감투와 같다고 하여 감투바위라 하였다.
● 감남골(감나무골) [골] : 성채골과 전터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감나무골인데 변하여 감남골이 되었다.
● 개머리봉 [산] : 덕고개의 남쪽, 전터골날망 북쪽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개머리 모양이라 개머리봉이라 하였다.
● 고래골(앞고래골) [골] : 갈밭에서 심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인데, 갈전에서는 이현쪽의 고래골을 뒷고래골이라 하고 갈전쪽의 고래골을 앞고래골이라고 한다.
● 독좌수(돌좌수) [골] : 연봉과 성채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불무골(분무골) [골] : 갈밭의 남쪽, 상봉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안개가 멋지게 많이 낀 모습이 안개를 뿜어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분무골이라 하였다.
● 삼바골 [골] : 진구렁이 서북쪽, 큰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삿갓봉(입봉笠峰) [산] : 전터골날망 남쪽, 진구렁이 서쪽에 있는 산봉우리로, 산꼭대기 모양이 삿갓(笠)처럼 생겼다 하여, 삿갓봉 혹은 입봉(笠峰)이라 하였다. 용호동·갈전동·장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우리이다.
● 상봉(象峰) [산] : 붉은댕이의 동쪽, 도장굴의 서쪽 사이에 있으며, 갈전동과 이현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우리이며, 모습이 코끼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상여골 [골] : 덕골에서 덕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로, 상여를 보관하던 상여집이 골짜기에 있었다 하여 상여 골이라 한다.
● 성재(성째, 성채) [산] : 독좌수의 남쪽, 성채골의 북쪽으로, 개머리봉 동남쪽 사이에 있는 높이 198.5 m 높이의 산으로 옛날에 적과 싸우던 성이 있어 성재라 하였다.
● 성채골[골] : 갈밭의 서쪽, 성채의 남쪽, 감남골의 북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성채 산봉우리 주위 골짜기 중 가장 긴 골짜기이다.
● 아래갈밭 [마을] : 갈밭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 안산(案山) [산] : 상봉의 북쪽, 갈밭 앞에 있는 산이라서 안산이라 한다.
● 안산너머(솔밭굴멍) [골] : 안산 북쪽의 골짜기로, 분무골의 북동쪽에 있다. 안산을 넘어서 있는 골짜기이며, 솔밭이 많아서 솔밭굴멍 이라고도 한다.
● 양지말 [마을] : 윗갈밭의 북쪽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연봉(제비봉) [산] : 갈밭 북서쪽에 있는 247.5 m 높이의 산이다. 갈전동·부수동·용호동의 경계에 있는 산을 연봉이라 하며, 산의 모양이 제비집 같이 생겨서 제비 봉인데 한자로 연봉(燕峰)이라고 한다.
● 연봉고개 : 윗갈밭에서 연봉을 넘어, 평촌으로 가는 고개이다.
● 윗갈밭(웃갈밭, 갈전상리, 상갈) [마을] : 갈밭에서 산 위쪽에 있는 마을인데, 양지말과 음지말로 나뉘며 갈밭의 위치로 볼 때 위쪽에 있어서 윗갈밭이라 한다.
● 음지말 [마을] : 윗갈밭의 남쪽으로 음지쪽에 있는 마을인데, 산이 가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마을이라서 음지말이라 한다.
● 전터골 [골] : 감남골의 남쪽, 큰골의 북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위에는 전터골날망이 있다.
● 전터골날망 [마루] : 개머리봉의 남쪽, 큰골의 북쪽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위에는 전터골날망이라는 235.6m 높이의 봉우리를 가진 능선이다.
● 진구렁이(긴구렁이) [골] : 갈밭의 서남쪽, 삿갓봉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갈전동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진구렁이·긴구렁이라 한다.
● 찬샴(찬샘, 한샴, 냉천冷泉) [샘] : 아래갈밭에서 덕고개 올라가는 중간, 덕고개 가까운 곳에 있는 우물로 찬물이 많이 나온다 하여 찬샴이라 했다. 한샘은 찰 한(寒)자와 찰 냉(冷)자가 의미가 같은데서 오는 유추 현상이다. 냉천은 찬샴의 한자 표기이다.
● 찬샴골고개(찬샘골고개, 냉천현冷泉峴) [고개] : 아래갈밭에서 찬샘골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찬샴으로 올라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 큰골 [골] : 진구렁이의 북서쪽에 있으며, 전터골의 남쪽, 삼바골의 북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폭이 넓고 크기 때문에 큰골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