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동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04:04:26
조회
41
부수동(芙水洞)
◎ 부수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 삼형제바위[바위] : 성산의 산성 밑에 바위가 세 개가 있어 삼형제 바위라 부른다. 몇 해 전에 한 개는 없어졌고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 부수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부수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가장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구 직동, 서남북쪽의 삼면은 대청호에 둘러싸여 섬 같은 지형의 동(洞)이다. 부수동은 본래 연화부수(蓮花浮水), 즉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의 명당이 있다하여 부수(浮水)로 부르던 것이 부수(芙水)로 변한 것이라 한다. 또한 부수골은 서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성치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골짜기의 하나이다. 이 골짜기 끝에 연못이 있었는데, 못에 연꽃이 떠있어 부수(浮水)골이 되었던 것이다. 부수동은 성치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금강을 끼고 서쪽과 북쪽으로 넓은 들을 가지고 있던 동네이었다. 따라서 자연취락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대청댐에 담수를 시작하자 성치산만을 남기고 동네 전체가 물에 잠기어 육지 속에 섬과 같은 형국이 된 마을이다. 부수동의 전통마을로는 부수골 삼산·왜마루·음지말 등이 있었는데,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들은 신탄진·대전 등 인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부수동의 토지 이용실태
『'99통계연감』에 의해 살펴보면 총면적 968,813㎡로, 이 중에 전(田)이 38,752㎡로 4%, 답(畓)이 8,430㎡로 0.9%, 임야가 294,970㎡로 30%, 대지가 4,527㎡로 0.5% 등이고, 기타 도로용지 등으로 되어있다. 이는 부수동에 일반주민은 거의 거주하지 않고, 법정동으로만 유지되고 있는 매우 특수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수동의 자연경관은 대청호에 둘러싸여 섬과 같아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경관은 도시민의 휴양 및 전원시설이 입지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기는 하지만, 이곳이 개발제한구역이고 특수한 여건상 개발이 제한되어 있는 동(洞)이다.
◎ 부수동의 연혁
부수동의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비풍군을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 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지금의 부수동이 회덕현 일도면 부수동리로 나타나 있음을 볼 때, 조선 중기에 이미 부수동리라는 행정구역과 지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태종 이래 482년간 실시되어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 단위를 모두 폐합하여, 336개 군을 신설하고 이를 23개 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서 회덕현은 공주부에 속하는 27개 군의 하나인 회덕군으로 개편되었고, 부수동은 회덕군 일도면 부수동리가 되었다. 이 당시 회덕의 구역은 기존의 회덕 7개 면(현내면, 동면, 외남면, 내남면, 서면, 근북면, 일도면)에 공주군 5개 면(천내면, 유등면, 탄동면, 구즉면, 산내면)과 청원군 주안면을 편입하여 이전보다 크게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덕군과 진잠군이 통합되어 대전군으로 되면서 부수리는 부수리·삼산리·형지원리의 각 일부가 합하여져, 대전군 북면 부수리로 개편되었다. 1935년에는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와 대덕군이 분리되었는데, 이때 부수동은 대덕군 북면 부수리가 되었다. 그 후 1973년 북면이 신탄진읍으로 승격되면서 부수동은 신탄진읍에 속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의 지역 확대로 대덕군의 폐지와 동시에, 대덕구가 설치되면서 부수동은 신탄진동에 소속된 법정동이 되었다.
◎ 부수동의 유래 및 지명
○ 부수골 마을 : 부수골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로서 서당골의 남쪽, 삼산의 동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부수골에 마을을 세분하면 부수골·삼산·덕곡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부수골에는 모두 30호 정도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곡산연씨 20호, 동래정씨 3호, 경주김씨 2호 정도이었고 해방 후 약간의 타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왔다. 부수골은 곡산연씨가 주를 이루는 곡산연씨의 집성촌이라 할 수 있으나, 부수골의 가장먼저 입향한 씨족은 경주김씨라고 한다.
삼산 마을에는 30호 정도가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곡산연씨가 15호, 원주변씨 13호, 은진송씨가 2호 정도 거주하였다. 즉 삼산은 곡산연씨와 원주변씨의 집성촌이었다. 덕곡 마을에는 17∼8호 정도가 거주하였는데, 그 가운데 원주변주 6∼7호 정도이었고, 본관은 미상이나, 옛 대덕구 동면의 모래재 육씨로 일컬어지는 육씨들이 3호, 본관 미상의 유씨가 1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부수골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1977년 대청댐 건설로 신탄진·대전 등지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평택의 간척지로 이주하였다. 그 중 곡산연씨 50호는 평택의 간척지를 분양 받아 집단으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평택 보승면 사하리에는 다시 곡산연씨의 집성촌이 생겨났다. 부수골에 입향한 곡산연씨는 입향조이었던 연정설의 처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의 진주유씨라서 입향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부수골의 경주김씨는 경주김씨 가운데, 충북 회인에 거주하였던 자손의 후손들이라 한다.
○ 형지원(성지원, 성전)마을 : 형지원은 부수동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황호동과 접해 있다. 형지원은 길을 지나는 행려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관청이다. 성전으로도 불리는데, 곡산연씨의 집성촌으로 총 50∼60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형지원 마을은 크게는 음지뜸(음지말)·양지뜸(양지말)·서당골 등으로 나누어진다. 서당골은 형지원과 약간 떨어져 있으나, 생활권이 분리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형지원과 한마을로 불리었다. 그러나 형지원도 1977년 대청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신탄진·대전 등의 인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평택 보승면의 간척지를 분양 받아 이주하였다.
◎ 부수동의 세거성씨
○ 곡산연씨(谷山延氏) : 곡산연씨의 시조는 연수창으로 본래는 중국인이었으나, 고려 말 원나라의 공주를 배종래조(陪從來朝)하여 곡산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그리고 부수골에 입향한 곡산연씨는 입향조이었던, 연정설의 처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의 진주유씨 유종식 딸이어서 처향을 따라 입향하게 된 것이라 한다. 입향 시기는 연정설의 생년이 1431년(세종 13)이고 몰년이 1511년(중종 6)이었음을 볼 때, 15세기 전반에서 16세기 초반이라 짐작된다. 곡산연씨는 회덕의 사족으로 조선 중기까지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한 사실로 1672년 중수된 {회덕향안}에는 봉사 연희·훈련 연복·충의 연호겸·연필흥·연필구·연필원·연필형 등이 입록되어 있는 등 사족적 기반이 매우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가들 [들] : 삼정동 민촌의 동쪽, 삼산(三山) 서쪽 앞에 있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들로 들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하여 가들이라 하였다. 현재 가들은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대문앞들(대문앞뜰) [들] : 갈밭의 동쪽, 음지말의 서쪽, 배나미들의 남쪽, 파랑 바위 북쪽에 있던 들로 갈밭 마을 앞에 있던 들이라서, 대문앞들이라 하였다.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방골(작은방골) [골] : 남골의 남쪽, 세골(쇠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성치산에서 동구 직동 피골 쪽에 있는 골짜기를 큰방골이라 하고, 부수동에 있는 방골을 작은방골이라 하며, 지형적으로 오목하니 방처럼 생겨 방골이라 하였다. 또한 밤에 등잔불을 켜 논 형국으로 괘등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 배내미들(배내미뜰) [들] : 아래갈밭의 동쪽, 순미뜸의 남쪽, 대문앞들 북쪽에 있는 들로, 들 옆 강가에 배를 매어 놓았다 하여 배내미들인데 현재는 수몰되었다.
● 배오개(배고개) [내] : 형지원(성전)과 황호동 사이로 배가 다니던 하천이다. 삼정리배턱·젖밭거리·가들·한전을 거쳐 충북 문의면 후곡리로 배가 넘나드는 곳이라 해서 배오개라고 한다.
● 보두매기 [들] : 부수골의 서쪽, 삼정동 옥녀봉의 동쪽, 잔당의 남쪽, 하갈의 북쪽 사이에 있던 들로,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원래 삼정 지역이다.
● 복개들(복개뜰) [들] : 쇠골 끝에 있는 왜마루 앞의 들이다. 현재는 수몰되었다.
● 부수골 [골] : 서당 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성치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골짜기의 하나이다. 이 골짜기 끝에 연못이 있었는데, 연꽃이 떠 있어서 부수(浮水)골이 되었던 것이 후에 부수(芙水)로 되었으며, 또한 부싯돌이 나서 부숫골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에는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 부수골 [마을] : 부수골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로 서당골의 남쪽, 삼산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부수동에는 특수한 환경조건으로 인해 사람이 살지 않는다.
● 붉은뎅이(볼갱이) [들] : 방골의 서북쪽과 갈전동 성산 사이, 형지원 뒷산 너머에 위치한 들로 산이 붉어서 붉은댕이, 볼갱이라 하였고, 논에 물이 빠지면 흙이 붉다고 해서 붉은뎅이라 하였다.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삼산(三山) [마을] : 부수골의 북서쪽에 있던 마을로, 동남쪽으로는 성치산, 북쪽으로는 지명산, 남쪽으로는 연봉에 둘러 싸여 있는 마을이라 삼산이라 하였다. 지형이 옥녀가 머리 빗는 형국이라 한다. 현재는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삼산들 [들] : 삼산 마을 앞에 있는 들로, 마을이름을 따서 삼산들이라 하였고,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삼산천 [내] : 삼산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천으로, 마을 이름을 따서 삼산천이라 하였다. 현재는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서당골 [골] : 부수골의 북쪽, 성전(형지원)의 남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이 골짜기에 곡산연씨 종중에서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당을 세웠는데, 이곳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골이라 하였다.
● 서당골고개(방등마루고개, 돌고개) [고개] : 부수골의 북쪽, 성전의 남쪽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부수동과 황호동을 넘나드는 고개이다. 이 고개 아래에 서당이 있었기에 서당골고개라 하였다.
● 성재 [고개] : 부수골에서 황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에 성치산성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형지원(성전) [마을] : 부수동의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황호동과 접해 있다. 산줄기가 끝나는 곳이라 하여 형지원, 성전이라 하였다. 형지원은 곡산연씨의 집성촌으로 음지뜸(음지말)·양지뜸(양지말)·서당골 등으로 나누어진다. 서당골은 형지원과 약간 떨어져 있으나, 생활권이 분리되지 않아서 실제로는 형지원과 한마을로 불리었다. 대청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었다.
● 성치산 [산] : 부수동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부에 성치산성이 있으며, 동구 직동 웃피골과 경계를 이룬다. 바로 동쪽에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이 있다.
● 쇠골(새골) [골] : 방골 남쪽의 골짜기로 쇠가 난다고 해서 쇠골이라 하였다.
● 순미뜸[들] : 방골의 서쪽, 연봉의 동쪽, 붉은뎅이 남쪽, 배내미들 북쪽에 있던 들이었으나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숫들 [들] : 피골모랭이의 북쪽, 방체뚝 남쪽, 함박골 동쪽에 있던 들이었으나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왜마루 [마을] : 쇠골 골짜기 끝에 있던 마을인데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음지말 [마을] : 배내미들과 대문앞들 사이에 있는 마을로, 남쪽으로 산기슭이 있어 햇볕이 잘 들지 않아서 음지말이라 하였으며,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잔당 [들] : 가들의 남쪽, 보두매기의 북쪽에 있던 들이었으나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절터골[골] : 성치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어 절터골이라 하였다.
● 절터골고개(찬샘골고개) [고개] : 성치산 남쪽으로 내려오면, 부수골에서 동구 직동 찬샘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근처에 절이 있어서 절터골고개라 하였으며 부수골에서 찬샘골로 넘어가는 고개라서 찬샘골 고개라고도 하였다.
● 하갈 [들] : 갈전동은 아래갈밭·윗갈밭으로 나눠지는데, 아래갈밭을 하갈(下葛)이라 하고 윗갈밭을 상갈(上葛)이라 부른다.
● 함바위 [바위] : 성산의 밑에 있으며 함과 같이 생겼다 하여 함바위라 하였다.
● 병풍바위 [바위] : 성산의 밑에 있는 매우 큰 바위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고 하여 병풍바위라 하였다.
● 장군바위 [바위] : 성산의 밑에 있는 바위로, 장군이 말 타고 전쟁에 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장군바위라 부른다.
● 삼형제바위[바위] : 성산의 산성 밑에 바위가 세 개가 있어 삼형제 바위라 부른다. 몇 해 전에 한 개는 없어졌고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