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회덕향교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53
회덕향교

⓵ 조선시대 향교

향교(鄕校)란 전통시대 지방의 관립학교(官立學校)에 대한 명칭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지방학교의 연원은 멀리 고구려 시대의 '경당'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나, '향교'라는 이름으로의 역사는 고려시대에서 비롯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조선사회는 유교이념을 치국의 원리로 삼는 유교중심의 국가였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이러한 유교이념을 가르치는 기초적 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설립과 운영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부터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하에 전국의 330여 개의 군·현(郡·縣)에 향교를 설치하였고, '향교의 진흥'을 수령의 주요 평가항목으로 설정하는 등 그 진흥을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⓶ 향교의 입지

향교는 관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령(守令)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수령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이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향교가 있었던 곳은 당시 도회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위에서 교촌(校村), 교동(校洞), 향교동(鄕校洞), 교운리(校雲里), 교성리(校成里), 대교리(大校里), 교사리(校士里), 교평리(校平里), 교현동(校峴洞) 등의 지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으로는 이름에 학교를 나타내는 ‘교(校)’ 자가 들어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곳에 오래전부터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학교라는 것은 향교를 의미한다.

한편, 처음에는 향교 건물이 없더라도 가정집에서 스승을 두고 학생을 가르친 경우도 있으며 관아나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지금의 대전 대덕구는 동구 일원 및 유성구의 일부 지역과 함께 회덕현으로 편재되어 있었고, 지금의 대덕구 읍내동은 당시 회덕의 행정적 중심지였다. 따라서 읍내동에는 수령의 행정청인 회덕관아는 물론, 향교와 객사, 사창, 향사당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존하는 회덕향교는 읍내동 옛 관아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1리 남짓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⓷ 향교의 규모

회덕향교는 1410년(태종10)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대부분의 향교가 조선 초기에 건립되어, 회덕향교의 건립도 조선 초기에 이룩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회덕향교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려 1600년(선조33)에 중건하였고, 1872년(고종 9)에 다시 크게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건물은 당시의 것으로 보이며, 1945년 광복 이후로는 1969년에 향교의 전반적인 보수가 있었다. 원래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향과 후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지역사회의 민풍교화(民風敎化)라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성현들의 훌륭한 덕을 기리기 위한 제향(祭享) 공간과 기본적인 교육을 위한 강학(講學) 공간이 있었으며, 배우는 단계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지역사회를 위해 적극적인 실천까지 포함한다. 강학공간은 명륜당(明倫堂)이고 제향공간이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강당으로 실내의 사면 벽에는 교육지침이나 향교의 연혁 및 중수기 등을 적은 글들을 걸어 놓고 있었고, 대성전과 동·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유현과 조선의 18현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2월, 8월의 상정일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또 매월마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례(焚香禮)를 올린다.

향교에 제향공간을 두고 정기적인 제향을 시행하였던 것은 이를 통해서 여기에 모셔진 유현들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고, 배우게 하고자 함에서였다. 또한 향교에는 학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기숙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서 양재가 곧 그것이다. 회덕향교의 동·서 양재는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고 그 터만이 남아 있는데 왼쪽에 있으면 동재(東齋)로 이곳에는 양반자제 유생이, 오른쪽의 서재(西齋)에는 평민자제 유생이 거처하였다.

⓸ 교임의 서열

향교의 학생 정원은 행정구역의 크기에 따라서 차등을 두었는데,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90명, 도호부(都護府)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그리고 현(縣)에는 30명으로 각각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향교 교관의 법정 인원으로는 각 향교에 1명의 교관을 제수토록 하였고, 주·부·목(州府牧)에는 종6품의 교수 1인이 있었고 500호 이상의 군·현(郡縣)에는 종9품의 훈도 1인을 두고 관찰사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다. 또한 500호 미만의 작은 고을에는 학장을 두었고 향교마다 교장, 제장, 장의, 교임, 색장, 유사, 재임과 교노를 두었다. 나라에서는 향교의 재정운영을 위하여 학전(學田) 5∼7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케 하였다. 그러나 이 외에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토지의 매수 등을 통하여 많은 전지를 소유한 향교도 적지 않았다.

⓹ 교육기능

조선시대 향교의 위상은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았다. 국가에서 서책을 지급받아 교생들의 교육에 사용하고, 그 지역의 도서관 역할도 담당하였다. 향교는 처음에 향촌교화와 과거를 통한 인재 양성의 목적을 가지고 건립되었기 때문에 향교교육은 제도적으로 과거제도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향교나 서원의 학생들은 과거급제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교육과정도 과거에서 출제되는 시험과목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향교의 교강 과목은 교생의 입학년도에 따라 다르다. 입학 첫 해에는 소학•대학•시전(詩傳), 2년째에는 논어•서전(書傳)•가례, 3년째에는 맹자•주역•심경, 4년째에는 중용•예기•근사록으로 시험을 치렀다. 이것은 향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교생을 교육시켰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여기에서 공부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호칭을 받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이 된 후에는 다시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고급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촌사회에 서원이 크게 성하게 됨에 따라 향촌 사대부 자제의 교육이 주로 서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향교의 교육기능은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향교의 제향기능만은 중시되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정치가, 행정가들이 이곳 회덕향교에서 배출되었다. 그들은 조선조의 후반부를 하나의 학파로 묶는 역사를 창조하기도 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역사의 커다란 획을 그었고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 문화 환경'이다. 회덕향교의 대성전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⓺ 향교의 유지와 운영

향교의 중요한 행사 가운데, 하나는 문묘향사이다. 봄과 가을에 모시는 석전대제와 초하루 보름에 행하는 삭망분향이 그것이다. 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제향을 통하여 유교사상의 유지와 보급에 그 의의가 있었다. 오늘날 향교는 지역 주민을 위해 충효교실을 개설하는 제도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예절교육이나 한문강좌, 서예 강습, 유도사상, 강좌 등이 있다.

향교는 비록 초기의 설립 목적과 비교하여 지위와 역할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여전히 선현에 대한 향사를 주관하고 지방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등의 그 기능과 역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⓻ 위치와 구성

회덕향교는 회덕의 관부(官府 : 현 읍내동 회덕동행정복지센터)에서 북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구릉지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국 향교의 위치는 대개 고을을 약간 벗어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에 자리하게 되는데 주로 관부(官府 : 또는 客舍. 城. 鎭山)를 중심으로 읍성(邑城) 밖에의 구릉지에 배치하고 있다. 관부의 입지에 따라 향교의 위치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관부의 동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에도 일부 두고 있지만 남쪽은 두지 않는다. 이는 동헌이나 객사 등 관부가 자좌오향(子坐午向)하는 관계로 그 기능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향교는 관부와의 거리가 대개 1리에서 3리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향교가 관학(官學)으로 관부의 지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향교의 기능이 약화됨을 짐작할 수 있다.

향교의 건축 공간 구성은 크게 2개의 공간으로 구분되며, 좀 더 세분하면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봉안한 묘당(廟堂)으로 여기에는 대성전을 포함하여 동무와 서무(회덕향교는 동‧서무가 없음)가 배치된다. 이와 같은 사당이 있는 곳을 '제향(祭享)공간'이라 한다.  다른 하나는 유생들이 머물며 강론과 독서를 하는 교육공간으로 이를 '강학(講學)공간'이라 한다. 이 공간에는 명륜당(강당)과 동재(東齋)·서재(西齋)가 배치된다.

⓼ 건물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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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건물의 배치는 제향공간과 교육공간이 놓이는 위치에 따라 구별된다. 향교건물이 앞뒤로 위치하는 경우에는 산을 배경으로 한 경사지인가에 따라 배치형태가 달라진다. 그 이유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강학공간인 명륜당보다 우위의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향교는 대부분의 향교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전학후묘의 형태도 명륜당과 동•서재가 놓이는 방식에 따라 다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향교가 평지에 있는 경우에는 '전묘후학'식 배치를 하는데 경주향교, 나주향교에서 볼 수 있다. 향교가 구릉지에 세워지는 경우 명륜당을 앞에 두는 '전학후묘'식 배치가 많다. 우리나라 향교에는 이런 배치가 가장 많다. 또 향교 중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좌우로 평행하게 두는 경우도 있다. 좌측에 대성전을 배치하고 우측에 명륜당을 배치한 것은 '좌묘우학(左廟右學)'이고, 좌측에 명륜당을 배치하고 우측에 대성전을 배치한 것은 '좌학우묘(左學右廟)'가 된다.

경북의 성주향교. 부산의 동래향교. 등은 '좌묘우학'식 배치이고, 충북의 진천향교. 경북의 청도향교. 전남의 익산향교 등은 '좌학우묘'식 배치이다. 회덕향교의 배치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행랑채 모양의 긴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의 가운데 입덕문(入德門)이 있고, 문 좌측 편으로는 서재(書齋)가 그리고 우측 편으로는 제사의 업무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이어 뒤편으로 명륜당이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을 좌(우)로 돌아가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이곳이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하던 동·서재(東西齋)가 위치했던 자리이다. 이곳을 지나면 구릉을 한 단 높여 대지로 조성한 다음 내삼문을 세웠다. 내삼문 안쪽에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배치되어 있다. 모든 건물들은 중심축선을 두고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