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의 역사문화

석전제

작성자
대덕문화원
작성일
2025-04-07
조회
61

석전제






⓵ 석전의 의의

전통사회(傳統社會)에서 산천(山川) 묘사(廟社)에 올리던 제사(祭祀) 또는 학교(學校)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追募)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儀式)이 석전이다. 석전(釋奠)의 유래(由來)와 의미(意味)에 대해서는 『주례(周禮)•예기(禮記)』 등 유교경전(儒敎經典)에 기록이 있다.

석(釋)은 나물을 뜻하며, 전(奠)은 드린다는 뜻으로서 제물(祭物)을 올릴 따름이고, 일설에는 소나 양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音樂)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釋奠)이라 하며 오직 나물만 드릴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음식을 석채(釋菜)라 한다.

⓶ 이, 팔, 상정일(二, 八, 上丁日)의 의의

『예기(禮記) 제법론(祭法論)』에 이르기를 저 천도(天道)를 합하여 봉에 체제(禘祭)를 지내고 가을에는 상제(嘗祭)를 지낸다. 그러므로 춘추(春秋)를 택한 것이며 2•8월로 정한 것은 우로기유(雨路旣濡)의 계절과 상로기강(霜露旣降)의 계절을 택하여 중춘(仲春)과 중추(仲秋)로 한 것이며, 초정일(初丁日)에 고대(古代)로부터 거행되었는데 초정일(初丁日)에 제례(祭禮)를 지내는 이유는 정자(丁字)가 든 날이 십간십일(十干十日)중 가장 길(吉)하다는 유래에 근거하여 매년 춘추중월(春秋仲月) 상정(上丁: 2월과 8월의 첫째 丁日) 초일각(初一刻) 사경일점거행(四更一点擧行) 하였다.

⓷  개요

중국의 상대(上代)에는 선성(先聖)·선사(先師)의 제사로 발전하여 주공(周公)을 제사하다가 한(漢)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재위 57∼75)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先聖), 안회(顔回)를 선사(先師)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明)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廟)를 설치하고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國學:大學)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國子監:成均館)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位)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지급하였으며 지금도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고 있다.

⓸ 배향인물

회덕향교의 대성전의 배향인물은 모두 27위이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현이 9현이고, 신라이후 조선말까지의 우리나라의 유현이 18현이다. 현재 회덕향교의 대성전에 배향된 유현들은 다음과 같다.

◎ 5성(五聖)

※ 배향위치 : 5성위 중앙에 소목으로 배향

· 공 자(孔子, 大成至聖 文宣王, BC551-BC478) 대성지성 문선왕 감실 내 독안 위패

· 안 자(復聖公 顔子, BC521-BC490) 독안위패

· 증 자(宗聖公 曾子, BC505-BC436) 독안위패

· 자 사(術聖公 子思, BC483-BC402) 독안위패

· 맹 자(亞聖公 孟子, BC372경-BC289경) 독안위패

· 공부자 영정 : 1963년 공부자 73대손으로부터 진서규 장의가 구입 기증함.

◎ 송조 4현(宋朝 四賢)

※ 배향위치 : 동서 벽에 종향

· 주돈이(道國公 周惇頤, 1017-1073)

· 정 호(豫國公 程顥, 1032-1085)

· 정 이(洛國公 程頤, 1033-1107)

· 주 희(徽國公 朱熹, 1130-1200)

◎ 한국 18현(韓國 十八賢)

· 설 총(弘儒侯 薛聰, 650-740경) : (경주) 신라 경순왕 때 이두문자로 유교경전 유교 대중화

·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 : (경주) 12세 당나라 유학, 18세 때 빈공과 합격 율수현 縣尉 (설총보다 2년 먼저 배향)

· 안 향(文成公 安 珦, 1243-1306) : (순흥) 최초 성리학 소수서원 초상화 국보지정 (충숙왕 원 화가, 고려 때 )

·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1337-1392) : (연일) 3은 중 1 지방에 향교설립 중종 조에 배향

·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1454-1504) : (서흥) 소학을 평생 공부 그대로 실천

·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1504) : (하동) 정몽주, 김종직으로 이어온 정통 성리학자.

·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1519) : (한양) 유교의 至洽주의를 기반으로 개혁정치 주장

·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1553) : (여주) 민본사상 근거 도덕정치 서화담 氣論  理論

· 이 황(文純公 李 滉, 1501-1570) : (진보) 유교 경전 서술, 도산서원 건립 제자 류성용(대제학)

·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1560) : (울산) 중용사상을 기본으로 유교의 원리를 알리는데 공헌

· 이 이(文成公 李 珥, 1536-1584) : (덕수) 과거에 9번 장원 10만 양병 설 숙종, 대사헌, 이조참판

· 성 혼(文簡公 成 渾, 1535-1598) : (창녕) 임란 시 광해군 호종 율곡과 우계 퇴계와 고봉

·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1631) : (광산) 대 예학자, 가례집람, 상례비요, 숙종 43년 문묘배향

· 조 헌(文烈公 趙 憲, 1544-1592) : (배천) 임란 때 의병 1,600명, 금산서 700 의병과 순절

· 김 집(文敬公 金 集, 1574-1656) : (광산) 한국 유교의 독창성을 빛내준 기본 틀을 갖추어 놓음

·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606-1672) : (은진) 우암과 북벌계획 산림의 종장

·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1689) : (은진) 북벌계획 추진 성리학자 宋子大全 정조가 자호 함)

·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1695) : (반남) 숙종 때 유학자 고려에서 조선까지의 東儒師友錄 영조 40년 문묘배향

이와 같이 회덕향교에는 5성과 송조 4현 및 한국 18현의 위패를 모두 대성전에 배향하고 있는데, 중앙에 5성의 위패를 모시고, 동서 양 벽에 송조 4현과 한국 18현을 차례로 배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향교 배향 인물의 구성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배향과는 다르며, 또한 현대의 다른 향교들의 그것과도 일치되지 않은 바가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해방 이후인 1949년 전국유림 대회에서 동서무에 배향되어 있던 조선의 유현들을 대성전으로 올려 배향하기로 결의한 이후의 변화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송조 4현과 한국 18현의 위패를 대성전의 양 벽에 배향할 경우 그 위차(位次, 곧 배향 순서)를 정함에 있어서도 향교에 따라서 각각 상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의 송조(宋朝) 유현을 먼저 배향하고 다음으로 한국의 유현을 차례로 배향하는 경우와, 이와는 달리 송조 유현이나 한국 유현을 가리지 않고 다만 그 연령순으로 위차를 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회덕향교의 경우는 전자를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지역 유림의 보수적 경향을 보여주는 한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⓹ 공자

[1]. 공자의 생애

공자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로 본명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 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 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 ·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3].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 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 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